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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대문

by 남연우

밤 아홉 시 반, 홀로 계신 노모께 전화드렸다.

"엄마, 뭐 해?"

"이래 이슥한 시간에 전화했노?

불 끄고 누웠다."

"왜 이리 빨리 주무셔.

전에는 열 시 넘어 늦게 주무시더니."

"요새는 빨리 잔다.

노래 부르고 있었다."

"무슨 노래? 오동추야~ 그거 불러?"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엄마는 어두운 그 밤에 혼자서 처음 듣는 노래를 구수하게 불러주었다.

이 노래는 언제 배웠냐며 물어보니 예전에 배운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분명 처음 듣는 노래였다.

가사 중에 열두대문이란 말이 귀에 콕 박혔고 찾아보았더니 '방랑시인 김삿갓'이란 노래였다.


지난해 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구멍 숭숭 뚫린 일 년이란 시간을 홀로 견디셨다.

짝 잃은 외기러기 날개 깃털에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을지 자식으로선 쉽사리 짐작이 안 된다.

당신의 남은 날도 머지않았음을, 영감님 곁으로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먹어도 맛이 달지 않고, 걸어도 자꾸만 균형이 어긋나는 걸음을 걸으며, 기쁨도 눈물도 메마른 하루하루 살아가고 계실 엄마.


창문에 어렴풋이 비치는 가로등을 벗 삼아

처녀 적 배웠던 그 옛날 노래를 부르며

흰 구름에 부딪혀 우수수 떨어지는 별들을 헤아리며

긴긴밤 허전함을 달래는 우리 엄마


그 밤 엄마의 사무친 고독함이 내게로 뼛골을 타고서 전해져 울컥하였다.

내가 나이 들어 엄마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떤 심정일까?

말을 듣지 않는 관절을 서서히 움직여 음식을 차려 먹는 일상행위도 귀찮아질 것이다.

홀로 이부자리를 펴고 홀로 어둠을 붙잡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한밤중에 깨어나도 내 곁에 아무도 없고 아침이 왔다고 깨우는 이 없이 홀로 일어나고 찬밥에 물 말아서 밥은 먹어야 하고 어느 누구 들여다보지 않는 텅 빈 하루 또 낮잠을 자고 테레비 기계음도 무관심해지고 마당이나 거닐어볼까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내려서서 몸을 움직여보는데 한 번 간 내 님은 온데간데없고 진달래꽃은 어김없이 봄이 왔다고서 연분홍 손 편지를 수줍게 펼쳐 보이는데... 아, 무상하다. 이 세월이란 놈!


엄마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열두 대문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어떤 권세가 으리으리한 집이길래 열두 대문을 거느린 걸까.

하인들이 여닫는 그 대문마다 문간방이 딸렸을 테고 남문 북문 동문 서문 부드러운 봄바람이 들어오는 바람문 별당아씨가 사는 별당문 사랑채로 드나드는 사랑채문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중문 고운 꽃들이 사는 뒤뜰문 후원을 지나 뒷산 대숲으로 향하는 대숲문...



정선 아리랑 노랫말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열두대문 부잣집에서

문전 나그네 괄시가 웬말이더냐

초가삼간 오막살이를 찾아들어

물 한 그릇 청할지언정

지나는 이들

그 집 대문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천하만민은

열두대문집 지나

열두 살 어린 소녀의 절창이 흐르는

초가삼간 오막살이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음이니


열두대문집 진수성찬보다

초가삼간집

열두 살 어린것의 만고에 빛날 노래 한 수

듣고 싶음이라

그 집 사립문 옆에 앉아

물 한잔까지 대접받으면

나그네 더 바랄 것이

하늘 아래 무엇이 있겠는가"



아흔아홉 칸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 술잔 부딪는 흥취 전 부치는 기름냄새 담장 너머 풍류가 넘쳐나도 열두 대문에서 구걸하는 문전 나그네 박대한다면 그들의 기름진 곳간은 삼 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갈 길 바쁜 나그네는 우물가에 걸터앉아 다디단 우물물을 마시는 게 뒤탈이 없고 속 편하다.


그간 내가 걸어 잠근 대문은 어떠한가.

내 마음속에는 살아오며 무수히 쌓고 허문 집들이 산재해 있다.

엷은 옥빛 물기가 서린 추억의 고향집, 학업의 집, 직업의 집, 내 가정의 집, 재화를 쌓는 금고의 집, 욕망의 집, 문학의 집, 修養의 집, 자연의 집, 인간관계의 집, 우정의 집, 꿈의 집..


그 집집마다 큼지막한 대문이 걸려있다.

어떤 집 대문은 굳건히 잠겨있고 어떤 대문은 문턱이 낮아서 쉽게 드나들고 어떤 대문은 문턱이 높아서 드나드는 이 드물고 늘 열린 문이 있고 주로 사용하는 통로에는 빗장이 필요 없다. 그러나 문은 문 언제나 문단속이 필요한 법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문은 묵직하게 끌리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어떤 시인은 문이 내는 소리를 문틈에 숨어 사는 새소리에 비유하였다. 그 새는 자신의 날개가 문틈에 끼여 피를 토하며 숨통을 틔우는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문에 납작 끼여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새는 문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한다. 질식하면서도 질식하는 줄 모른 채 살아가다 보면 형틀에 눌려 압사한다. 문이 내는 소리는 한 마리 새가 살려달라는 긴급구조 콜 아닐까.


처음에는 피를 흘리며 자신의 날개를 빼낸다.

차츰차츰 빼내어 날개가 다 빠진 새는 언젠가 훨훨 날아서 저 푸른 창공 속으로 자유를 되찾아서 날아갈 것이다. 새가 탈출한 문은 더 이상 신음소리를 내지 않게 될 테고.

일찍이 문이 닫힌 집들은 폐가로 방치될지도 모른다.

한때는 훤히 불 밝혔지만 이젠 소용이 없어진 집은 허물어진다.

그 집 담장에 찬란한 매화꽃 피어날지라도 퇴락의 아름다움은 그 꽃마저 서럽기만 하다.

그 집들 중엔 누군가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집도 있다.

관계를 튼 발걸음이 조용히 다가옴으로써 길이 생기고 조금은 어색하지만 새싹처럼 움이 트는 그 집에는 마당이 생기고 울타리가 생기고 황토벽을 쌓은 창문에는 달빛이 스며들어 온기가 생기는 집.


모든 집은 언젠가 부서진다.

집이 허물기 전에 대문이 먼저 부서진다.

문짝이 쓰러진 대문을 삭풍이 삐거덕거리며 뒤흔들면 무덤에 핀 할미꽃은 그저 빙긋이 웃는다.

세월이란 그놈, 그 폐허 위에 새집을 짓고 누군가를 청하여 한 그루 벚나무를 또다시 심는다.


어둑한 저녁 엄마가 밝혀놓은 따스한 불빛이 스며드는 고향집으로 벚꽃이 피는 이봄 나는 찾아가리라.

엄마가 좋아하는 떡 반찬 바리바리 싸들고서 맑은 봄바다 흰 파도가 밀려오는 내 고향집 마당에 들어서리라. 가서 "엄마~" 크게 부르리라.

꾸벅꾸벅 낮잠을 주무시던 엄마가 깜짝 놀라 버선발로 나와서 반기는 내 고향집.

그 집 문에 사는 새는 벌써 공중을 차고 날아올라 날개를 붙인 채 저공비행 활공 그 집 처마로 날아든다.

박씨를 문 제비가 찾아왔다.






** 산불이 발생하여 마음이 무겁습니다.

특히 경북 내륙은 제 고향 가는 길목이어서 그 길이 화염에 휩싸인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나지막한 구릉들이 펼쳐지는 의성의 사과나무 과수원, 안동시 길안면을 지날 때는 저 평화로움이 깃든

언덕에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늘 간직하였는데요.

단감이 그려진 단촌면 터널도 정겨워 하였지요.

민관군 총동원 어서 빨리 주불 잔불이 진화되길 바랍니다.

노인이 대부분인 이재민들이 냉기 올라오는 차가운 바닥 위에서 얇은 이불을 덮고 뜬밤을 지새우는 모습 안타깝습니다.

이번 산불로 목숨을 잃으신 분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여러분도 이재민들의 아픔을 헤아리며 기부금 행렬에 동참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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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jpg 기어이 봄이 찾아왔다고 일어서는 봄나무들, 물가에 선 수양버들 가지에 물을 듬뿍 묻혀 불을 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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