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고 닦고 먹고 마시고, 인생의 기본"
아흔을 훌쩍 넘긴 어느 할머니가 굽은 손으로 한옥 툇마루를 닦으면서 하신 말씀이다.
할머니 집은 정남향 마을 제일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빛을 한 아름 들여놓은 듯 집이 훤했다. 백 년 넘은 고택이 쓸고 닦고 윤기를 낸 할머니 손길에 온기가 서려 빛이 났다.
인생의 기본, 그 말이 계속 귓가에 감돌았다.
혹 기본을 우습게 여기면서 벗겨내면 그만인 한 겹 껍질에 한눈을 팔진 않았던가.
기본은 알맹이다.
알맹이는 사물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을 말한다.
껍질에 싸여 잘 노출이 안 되는 알맹이는 남들이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자기 만족감을 주는 영양제이기도 하다. 겉모습은 번지르르한데 속이 빈 사람, 겉은 헙수룩한데 속이 꽉 찬 사람, 겉모습도 매력적이고 속이 야무진 사람. 당신은 어느 편인가?
속이 빈 사람은 싱크홀처럼 언젠가는 무너진다.
내 것은 비워두고 남의 것 곁눈질하다 시간의 무게가 쌓이면 빈 공동은 맥없이 주저앉는다.
기본은 유형뿐만 아니라 무형을 아우른다.
무형의 가치관을 잘 실천하다 보면 유형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좋은 인성의 밑거름이 되는 가치관들을 물 흐르듯 꾸준히 실행해 나가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비난받는 삶은 모면하게 되리라.
할머니가 말씀하신 쓸고 닦는 기본기를 요즘 베란다 공간에 할애하고 있다.
겨우내 거실에서 키우던 화초들을 베란다로 내놓으면서 화분 받침대 다리가 흔들거리고 불안정했다. 합판 소재 상판은 물기에 부풀어 너덜거렸다. 이 단으로 된 원목 소재 받침대를 새로 구입 화초들을 이주시켰다. 판잣집에서 이층 양옥으로 이사한 화초들은 때깔이 달라 보였다. 분명 이전의 똑같은 화초들인데 말이다. 한 달 앞당겨 피어난 장미와 한 뼘 키높이 올리브나무도 새 식구로 맞아들였다. 오렌지자스민, 안개꽃, 노란 앵초꽃, 피다 멈춘 동백, 장미들이 벚꽃잎 날리는 봄바람에 감미로운 향기를 실어주었다.
아테나는 포세이돈과 도시 아테네를 두고 누가 더 인간에게 유용한 선물을 줄 것인가에 대해 내기를 하였다. 포세이돈은 말과 소금샘을,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선물해 주었다. 아테네인들은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올리브나무가 더 유용하다고 선택하게 된다. 고대 문명부터 인류에게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된 올리브나무 꽃말은 '평화, 풍요, 번영'을 상징한다.
지중해 근처에서 수천 년 살아온 올리브나무가 햇빛이 풍부한 나의 정원에서 무탈하게 잘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에스닉 스타일 황마 매트를 타일 바닥에 깔고 라탄의자를 두었다. 의자 옆 먼지 낀 장독 뚜껑을 닦아내고 꽃무늬 손수건을 덮어 테이블 용도 찻잔을 두었다. 쓸고 닦고 기본을 다한 베란다는 젖은 빨래가 죽죽 걸린 이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일인 전용 카페로 변신하였다.
장미가 사는 티크 원목 빈 공간에 눈치껏 두 발을 올려두고 놀다가는 봄볕을 불러 음악을 듣노라면 두 눈이 스르르 감긴다. 물기 머금은 먹구름이 자아내는 빗소리는 더욱 운치 있다. 소심한 성격만큼 쪼금 열어두던 창문도 통기를 위해서 활짝 열어젖힌다. 창문이 활짝 열린 걸 제일 먼저 알아챈 건 새들이었다. 바로 앞 공원에서 지내는 새들 목소리가 가까이서 상냥하게 잘 들린다.
주방과 연결되고 가전제품이 진열된 너른 거실보다는 한평 남짓 베란다에서 소중한 힐링을 얻는다. 바람과 햇빛이 제일 먼저 와닿는 작은 공간을 좋아하는 화초들과 녹색 연못이 나날이 짙어지는 공원 조망을 내다보면서 숨결이 평온해진다. 꽃들이 지기 시작하는 지금부터는 나뭇잎의 시간이다. 눈비 맞으며 오래 기다린 나무에게 고요한 기쁨을 안겨준 꽃들의 시간은 잠시잠깐 푸른 나뭇잎이야말로 나무의 기본이 되어준다. 팔랑거리는 나뭇잎으로 먼지를 쓸고 닦으며 청정한 그림자를 던지는 나무같이 녹슨 내면의 그릇도 마른 헝겊으로 정갈하게 닦아낸다.
누군가 날카롭게 긁어놓은 스크래치, 스스로 쌓은 모래성이 무너지는 자기 환멸, 연민과 상처들이 얼룩진 못난 그릇 속에 내 지난날의 시간이 담겨있다. 어둠 속에 어렴풋이 반짝이는 푸른 별 같은 추억은 아름답게 보인다. 잉걸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로는 나의 화분. 이미 꺼진 재를 뒤적여 나무 모종을 심는다. 한 바가지 물을 뿌려준다. 키우는 재미도 재미지만 덤으로 열매를 내어준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달게 받겠다. 기본을 다했기에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은 자연이 허락한 선물. 나의 올리브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내어주는 그날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쓸고 닦고 부지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