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딸 이야기
큰딸은 상냥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종달새가 노래하듯 조잘조잘 재잘거렸다.
그래서 친구들은 누가 있고, 담임선생님 성격까지 훤히 파악하였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짝꿍이 자꾸 괴롭힌다고 말하였다.
책상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협박(?)한다는 것이었다.
미술시간 만들기 할 때는 재료들이 널브러져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아이와 베프가 있는데 그 아이도 가담해서 딸을 한 번씩 놀린다는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그런다고 힘들어하기에 1학기 상담주간을 통해 담임선생님께 짝꿍을 바꿔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미 아이를 통해 선생님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남자 선생님은 무덤덤하게 반응하였다.
"그 애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서요, 지금 당장 바꾸긴 어려워요."
이럴 땐 엄마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등교시간 맞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문 앞에서 그 아일 기다렸다.
예상대로 등교시간 임박 느지막이 두 녀석이 걸어오고 있었다.
"너 OO 맞지?"
"네."
"나 윤이 엄만데 너 우리 윤이 책상 선 그어놓고 자꾸 괴롭힌다면서? 또 그러면 선생님께 말해서 혼낸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푹 숙이고는 가는 그 아일 보면서 관심의 표현 같은데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이 같았다.
그 후 그런 일은 없었고 친구 문제로 딱히 학교에 가는 일은 없었다.
도널드덕처럼 입술이 샐쭉 올라가서 귀엽게 생긴 큰딸과 나를 닮아서 입술이 두껍고 말이 없는 작은딸은 성격이 온순하여 아무 문제없이 학교에 잘 다녔고 지금은 둘 다 대학생이다.
지난해 말부터 큰딸은 집 근처 미술학원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 미술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딸은 잘 적응하였다.
저번에는 어떤 여자아이가 "선생님 좋아요." 하면서 뒤에서 와락 안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생글생글 웃으면서 요구르트를 딸에게 내밀었다고 한다.
어제저녁 알바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딸이 말하였다.
"엄마, 아이들이 나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하면서 웃음 지었다.
눈이 땡그랗고 아주아주 귀엽게 생긴 여섯 살 꼬마가 딸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하더란다.
"선생님, 사랑해요."
그리고는 요거트를 주었다고 한다.
딸의 수업을 받다가 토요일 수업으로 바뀌면서 딸을 못 보게 된 어떤 아이는 원장님께 윤이 선생님 보고 싶다면서 윤이 선생님 너무 좋다고 자꾸 말한다고 하였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그 나이 아이들 눈에 꾸밈없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나 보다.
집집마다 한 명만 낳거나 아이가 귀해진 요즘 공주 왕자 대접받는 아이들이 학원에 와서 시끄럽게 굴어도 엄숙한 표정으로 따끔하게 소리치는 걸 못하는 딸은 그저 부드럽게 "얘들아, 조용히 하자." 말한다.
그런 선생님이 조근조근 그림과 만들기를 도와주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예쁘기도 하고 말이다.
"선생님, 애인 있어요?" 관심이 지나쳐 이런 질문도 서슴없이 해대는 아이들.
"아니 없어." 말하면 "아이~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고 한다.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행복감에 겨워 아카시아 향기 감도는 공원길을 걸어서 집으로 왔다는 딸의 순수한 청춘이 부러워졌다. 이리저리 굽은 아득한 인생길을 앞두고 꿈과 이상이 드리운 맑은 이마 아래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갓 피어난 꽃송이를 떠받친 가느다란 목덜미, 아무런 오점이 찍히지 않은 딸의 청춘이 요즘 피는 순결한 아카시아 꽃 같았다. 내가 청년이라면 이쁜 우리 딸 여자친구 만들 것 같은데...
작은딸은 성격이 과묵한 편이다.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고 스킨십은 잘하는데 자기 얘기를 통 할 줄 모른다.
친구도 한 명만 깊게 사귀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밖으로 언어화시키지 못한다.
빛이 굴절돼 들어가면 삼켜버리는 블랙홀같이 작은딸의 내면에 들어간 세상은 어떤 형상화 과정을 거치는지 그 세세한 느낌을 알고 싶은데 신호 전달이 끊겨버린다.
언젠가 아이 책상을 정리하다가 수첩에 적힌 시를 여러 편 보았었다.
중학생 때 쓴 시인데 시인인 엄마가 보기에도 섬세한 감정이 잘 다듬어진 시였다.
고등학교 3학년 상담주간 때 담임선생님이 딸이 글쓰기를 아주 잘하는데 어머니 알고 계시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말하자 딸이 쓴 글을 프린트해 주었다.
잘 써서 수업시간에 반 학생들에게 읽어준 글이라고 말하였다.
집에 와서 읽어보았다.
어렵다면 어려운 어떤 시에 대한 감상문이었는데 시에 숨겨진 화자의 심정을 풀어내어 그대로 비춘 듯이 읽어내는 감상능력이 탁월하게 적힌 글이었다. 그간 엄마인 내게도 말하지 않고 굳게 닫힌 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언어의 깊이와 결이 확 체감되었다. 이렇게 혼자 느끼기까지 고독했을 텐데, 작은딸은 심지가 깊은 아이였다.
올해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 원하는 전공을 택한 작은딸은 시간이 나는 틈틈이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딸이 세상과 소통하는 진실한 도구이고 표현 수단이기에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칭찬해 준다.
그간 공부하느라 붓을 든 일이 없었는데 서서히 본인의 잠재력을 깨우치는 것 같다.
그림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말을 잘하고 상냥한 큰딸과 말이 없고 과묵한 작은딸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 집은 작은 아씨들 집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둘이 키도 비슷하고 자기 방에 초록색 화초들을 여럿 키우는 깔끔쟁이 큰딸과 방이 어지러운 작은딸이 이제 성년이 되어 곁에 있어주니 든든하다.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딸들이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 아닐까.
지난 어버이날 큰딸은 핑크색 장미와 카네이션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작은딸은 가슴에 꽂는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를 가져왔다.
독박육아 키울 때는 참 힘들었지만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었다.
며칠 전 작은딸이 식탁에서 물었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또 여자로 태어날 거야?"
"아니, 여자로 살아봤으니 다음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아니다. 지구별에 태어나고 싶지 않아.
환경오염과 기계들의 간섭이 시작된 지구는 싫어.
저 먼 별나라 황소좌 플레이아데스성단에 선한 영혼들이 살아가는 별이 있대.
엄마는 거기 태어나고 싶어.
너랑 엄마는 이번 생이 마지막 인연이란다.
그러니 엄마 말 잘 들어.
청개구리처럼 굴지 말고."
말을 마치자마자 딸아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왜 울어..."
내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말없이 딸아이 등을 안아서 토닥거렸다.
_작은딸 씀.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라는 구절이 제일 내 마음을 울린 것 같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은 무엇일까?'
'그것의 감정은 무엇일까?'라고 계속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빈민촌에 사는 아이, 생일파티에 혼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누구의 탓도 못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슬픔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행성에게 감정이 있다면, 처음 자전을 시작하는 광경은 매우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행성한테는 말하지 못하는 왠지 모를 슬픔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런 내재된 비통하고 씁쓸한 심정을 말하는 구절인 것 같다.
<슬픔의 자전>이라는 시에서는 비유가 많이 사용되었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깎는다"에서는 사과를 지구에 비유해서 매우 창의력 있게 표현했다.
이 시의 제목인 슬픔의 자전에서 자전이 사과를 말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이라는 직유법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조금 더 울림을 주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시에서 슬픔의 표현방식이 좋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껍질", "혀 끝에 눈물이 매달려있다",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에 짠맛이 돈다"처럼 슬픔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아이는 가난하다고 엄마에게 투정 하나 안 부리고 가만히 슬픔을 삼키고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깎는다. 사과에 서려있는 엄마의 슬픔은 가난한 상황에서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마음을 잘 전달해 주는 표현방식이다.
시에 담겨있는 사회문제는 빈부격차인 것 같다. 반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생일파티에 혼자 초대받지 못하는 모습,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빈부격차가 있는 사회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서울에 있는 달동네가 생각났다. 서울은 높은 빌딩이 엄청 많은 화려한 도시인 반면 허름한 달동네가 모여있는 곳이 있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해있는 현상을 나는 너무 무관심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반성해 본다.
사실 나와 주변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앞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시를 아무한테도 소개해주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이 시를 읽고 느끼는 감정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순간 하찮은 감정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의 슬픈 감정을 나 혼자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