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여자네 집

by 남연우


여름은 향기로운 계절이다.

직사광선을 입은 개망초 백합이 낮시간을 향기롭게 하고 가로등에 비친 초록색 단풍잎과 그윽한 밤꽃 내음이 밤바람을 달큼하게 만든다. 꽃을 잃어버린 장미 가시는 쓰임새를 모른 채 헛헛한 허공을 찔러보는데 빗방울은 사선을 그으며 자꾸만 빗나간다. 가시에 찔리는 빗방울은 안개비를 머금는다.


습기에 민감한 곱슬머리가 효모를 먹은 반죽같이 부풀어 오름을 알아차린 여자는 서랍을 뒤져 고무줄을 찾아서 머리를 질끈 묶고는 투덜대기 시작했다. "벌써 여름이야? 또 얼마나 더울려나... 여름은 지긋지긋해."

하루에 한두 번 여닫는 화장대 서랍은 여자의 볼멘소리를 키우면서 난장판이었다.


악세서리를 보관한 가장 왼쪽 서랍은 양호한데 화장품 샘플을 보관하는 가운데 서랍과 헤어밴드 머리핀 고무줄이 뒤죽박죽 얽힌 오른쪽 서랍은 무질서하고 어지러웠다. 요즘 들어 복잡한 여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여행 갈 때 가끔 쓰는 화장품 샘플을 큰 비닐봉지에 쓸어 담아 따로 모아두었다. 앞으로 몇 달간 새로 구입하지 않아도 되겠다. 작디작은 용기들이 뒤엉켜 차지하던 자리를 비우자 휑하게 빈 공간이 드러나면서 구석에 숨어있던 빨간 지갑이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


똑딱이 단추가 헐거워진 것 말고는 예쁘게 생긴 오마샤리프 반지갑을 열면 love♧hate 음각 글자가 보이고 명함을 넣는 투명비닐 안에 귀여운 아기들 사진이 들어있었다. 어머나,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이 지갑엔 첫 마음이 들어있었다. 때가 전 동전 뒷주머니, 살림을 시작하던 그때 살뜰한 손길이 묻어 눅눅하고 눅진하다. 분명 백 원 단위 물가에도 민감했었다. 오직 아기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자신에게는 인색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검소하고 간절한 태도로 집을 장만하고 허튼 눈길조차도 삼가던 고임돌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유로운 시간이 놓이게 되었다. 그 첫 마음을 잊지 않고 다가오는 미래 노후생활에 임한다면 검박하면서 넉넉하게 지낼 거라 믿는다. 인생의 총량을 저울질할 때 애정과 애증,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까. 애증의 세월이었을지라도 첫 마음은 언제나 애정이었다. 증오를 녹여내는 애정만이 시간의 승리자가 된다. 여자는 손때 묻은 빨간 지갑을 제자리에 소중하게 밀어 넣는다.


많지도 않은 물건들을 질서의 이름으로 이동시키면서 드러난 서랍 밑바닥이 가려졌던 마음 바탕을 보여준다. 마음도 그러했다. 주인 없는 보따리들은 왜 그리 많은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풀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방치했었다. 괴나리봇짐을 멘 나그네들이 하룻밤 묵어가는 주막집이 이러할까.


해발고도 천 미터 깊고 깊은 산중에 사는 어느 스님이 말하였다.

운무가 덮이는 저녁 산사 저 아래 평지 기차역에서 기차 소리가 골짜기 땅거미를 타고 들려오면 주인 없는 그리움이 다녀간다고. 오감이 호출하는 기억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우릴 부른다.

그럴 때면 보따리에 싸놓은 잠재의식이 매듭을 풀고서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다시는 나오지 말라며 꽁꽁 묶어두었는데 어떤 시청각 정보가 뉴런에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면서 기억의 강물이 홍수 져 흐른다. 안전한 제방을 무너뜨리고 의식 위로 떠오른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떠내려가다 보면 현실은 오간데없이 과거에 저당 잡힌 시간은 뒤로 밀리고 밀린다.


여자는 정신줄을 꽉 붙잡고서 오른쪽 서랍으로 이동하였다.

고무줄은 고무줄끼리 집게로 집어서 한 꾸러미 모으고 머리핀은 작은 통에 모으고 헤어밴드는 오색 무지개처럼 가지런히 둥글게 쌓아 올렸다. 이렇게 하자 어지럽던 공간이 넉넉히 남아돈다. 손을 댄 김에 아일랜드 식탁 서랍 속 주방용품도 쓱싹쓱싹 정리해 버렸다. 꽉 막혔던 속이 트이면서 개운하다. 내 눈 속에, 오장육부 안에 숨겨놓은 서랍도 라벨링 이름을 붙여 정리해야겠다. 추억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 빗방울에 씻기고 창가 매달린 조가비 풍경소리 들으며 내보내야겠다.


그 여자는 여름에만 열리는 소파 뒤 거실 창문을 열고서 창틀에 낀 묵은 먼지를 닦아냈다.

나무젓가락에 물티슈를 끼워서 구석구석 꼼꼼히 닦았다.

검은 먼지를 벗고 새하얘진 창틀 위로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히자 창가에 선 소나무들이 맑은 바람을 비질하듯 쓸어준다. 엊그제 내린 비를 맞고 초록이 선명해진 솔잎에 앙증맞은 연두색 솔방울들이 새로이 맺힌 모습이 눈에 띈다. 소파를 치우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초여름 소나무는 올 한 해 과업을 절반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소나무가 부럽다.


소파가 차지한 공간은 폭 3미터 깊이 150cm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그 공간이 문득 아늑하게 보였다. 데드 스페이스를 살려내는 공간 실험을 하고 싶어졌다. 버티는 터줏대감 가죽소파를 서재방으로 밀어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치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소파라는 고정관념을 걷어낸 공간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쓸모 있는 공간의 재발견이었다.


여름 한철 머물기 딱 좋은 그 자리에 창고에 둘둘 말아둔 대나무 돗자리를 꺼내와서 깔았다. 이 돗자리는 아주 얇고 둥글게 저민 대나무를 연갈색 면사로 촘촘히 엮고 테두리는 황갈색 린넨을 입혀 마감처리한 꽤 고급진 돗자리이다. 이걸 깔자 마룻바닥의 격조가 달라져 보인다. 암체어 두 개를 끌어다 양쪽 벽면에 마주 보게 놓고 양치식물과 아이차카 화분으로 플랜테리어 하였다. 민트색 커튼 너머 새순을 뻗어 올린 전나무가 여름 바람에 흔들흔들 젠스타일 공간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그간 열 번의 여름이 지나간 이 집에 살면서 왜 한 번도 소파를 밀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물 좋고 정자 좋은 여름 별장을 내 집에 품고 있었지만 그 가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여기 이 공간에 앉아서 아이스커피를 레모네이드를 마시면 여름은 더 여름스러운 맛을 내게 되리라.

수박도 식탁이 아니라 여기 돗자리에 앉아서 쪼개 먹으면 더 시원하고 달달한 속살을 내어주리라.

소파 뒤 반쯤 닫혀있던 커튼을 걷어내고 창밖 풍경을 최대한 끌어오게 되자 밝은 채도가 감도는 집 분위기는 화창하다.


그 여자네 집은 베란다에 시크릿 가든이 자란다.

서풍이 불어올 때마다 보랏빛 라벤더 향기가 감돌고 청보라색 불꽃을 머금은 야생화 로벨리아, 브라질 자스민이라 불리는 덩굴식물 만데빌라가 완강기 고리에 매달려서 여자의 가라앉은 한숨을 구원하듯 피어난다. 최근 동백꽃처럼 붉은 꽃 한 송이가 나도샤프란 줄기에 뛰어내리더니 떨어져도 멀쩡한 꽃은 다시 한번 피어났다. 몇 해 전 천리포수목원에서 데려온 수국도 베란다에서 겨울을 나고 푸른 물방울 꽃이 피어났다. 청매실이 익어가는 항아리에선 밀밭 익는 냄새, 술 익는 냄새가 난다.

경계를 허물고 내 마음과 네 마음이 익는 냄새이기도 하다.


그 여자네 집은 물기 머금은 바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여름집으로 변신하였다.

비를 뿌리는 구름을 닮은 곱슬머릴 얌전하게 묶는 서랍 속 고무줄부터 뽀얗게 냉기 서린 화채 유리그릇, 잡념을 명랑하게 밀어내는 조가비 풍경소리, 여름 꽃들이 핀 베란다 정원에 장맛비 들이차면 여자는 무질서하게 돋아나는 괭이밥 잡초를 뽑아내고 비 내리는 풍경 속으로 젖는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에 뜬 기름과 같은 화기(火氣)의 속성을 가진 악(惡).

선악의 가치관이 온통 혼재된 세상은 지금 우중 범람한 황톳빛 강물이 흐른다.

그 강물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는 강가 대숲 같은 그 여자네 집은 어느새 여름이 무성하다.






image.jpg 장마를 앞두고 마지막 핀 베란다 장미 한 송이
image.jpg 향기로운 설중매를 거쳐 유월에 결실을 거두는 부지런함이라니... 이렇게 통통한 매실로 청을 담그다..
image.jpg 완강기 고리에 매달린 만데빌라, 꽃말은 '영원한 사랑'
image.jpg 수국, 로벨리아.. 로벨리아 실제 모습은 청보라색.. 푸르게 피는 여름 꽃들은 청초하다
image.jpg 밤 산책하며 만난 청단풍이 가로등 불빛에 비쳐 매력적이다, 초록색 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꿈꾸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