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Tiger Lily
늘 봐오던 것들이 어느 순간 뇌리에 각인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거기 때를 맞춰 찾아오는 자연물은 배경으로써 충실하기에 그 귀함을 잘 모르고 지낸다.
당위성은 새로운 관심이나 흥미를 잃기 마련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 같은 사람은 그 배경에 녹아드는 걸 좋아해서 스스로 원경으로 멀어지기도 하고 근경이 되기도 한다. 이 여름 나의 근경 속으로 바짝 다가와 준 대상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그녀의 이름은 참나리, 영어 이름은 타이거 릴리(Tiger Lily).
꽃이 간직한 선명한 주황색을 웹 색상에서 타이거 릴리색(#e2583e)이라 부르며 2004년 팬톤에서 올해의 컬러로 선정되었었다. 꽃의 생육 조건은 까다롭지 않아서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비탈진 언덕이나 풀밭 어디에서건 매오로시 피어난다.
한여름 태양의 열기를 빨아들인 주황색 피부에 주근깨를 콕콕 박은 참나리는 키가 훤칠하게 커서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을 닮았다. 만약 자외선차단제를 바른 꽃의 얼굴에 주근깨가 없다면 강렬한 개성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어릴 적부터 봐온 흔하디 흔한 참나리가 내 시선을 온전히 사로잡지 못한 것은 비슷한 시기 피어나는 향기로운 백합이 있어서이다. 빼어난 미모와 향기를 겸비한 백합이 화단을 점령한 꽃의 여왕이라면 나리꽃은 수수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들판에 서서 후두둑 내리는 소나기를 맞는다. 때로는 허리가 꺾여 쓰러지기도 한다. 경쟁에서 밀려 눈 밖에 난 나리꽃이 이 여름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 땀범벅 된 얼굴로 산길을 걸을 때였다.
초록색 나뭇잎을 흔들며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 속에 무언가 향기로운 내음이 들어있었다.
칡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는데... 선계에서 불어오는 향기 같았다.
열 걸음쯤 떼었을 때 알았다.
낭떠러지에 핀 주황색 꽃들이 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나를 두근거리게 만든 향기의 주인공이 그들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언어는 꽃들의 향기임을.
움직이면 덥고 습하고 불쾌지수를 유발하는 여름의 섭리는 밤하늘에 푸른 별꽃들을 피우고 땅 위에는 색상이 짙은 야생화들을 깨운다. 계절을 달리하여 피는 꽃들은 저마다 간직한 꽃말을 전해준다.
꽃의 생김새와 향기를 맡고 꽃말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그 순간 흐르는 시냇물에 씻기우듯 깨끗하게 정화된다. 이것이 꽃들을 세상에 내려보낸 신의 메시지 아닐까.
참나리의 꽃말은 "순결", "깨끗한 마음", "변함없는 사랑", "나를 사랑해 주세요".
봉숭아 분꽃과 함께 나리꽃이 피면 그 화분(花粉)을 따 모아서 손톱에 물을 들이거나 책가도에 그림을 그렸던 조상들은 나리꽃을 우리 고유의 길상 문양으로 귀히 여겼다. 나리꽃의 나리는 당하관(堂下官)의 벼슬아치를 높여서 부르던 호칭과 같다. 이런 까닭에 나리꽃이 벼슬아치라는 상징을 갖게 되었고 벼슬길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문양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우아함과 고귀함을 상징하는 이 꽃은 한국 문화에서 사랑과 헌신의 의미로 결혼식이나 특별한 행사에 자주 사용되었다.
나리꽃은 내가 가는 곳 어느 곳이나 따라다녔다.
내가 무작정 나리꽃을 따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른 여름휴가를 간 어느 해변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닷가 바위 언덕에도 피어있었고 태종대 가파른 절벽에도 주황색 꽃들이 듬성듬성 암석을 비집고 아찔하게 자라고 있었다. 갈맷길을 걸을 때는 울타리 밖으로 한 송이가 비죽 나와 있어서 코를 내밀었더니 먼저 걷던 딸들이 갑자기 깔깔 웃었다. 아기 사슴 담비처럼 짙은 꽃가루가 묻은 얼굴로 여기저기 쏘다녔다. 썰물이 모난 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레가토, 짧게 끊어치는 스타카토 기법으로 연주하는 몽돌해변에도 피어있었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내 안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모난 돌들이 부딪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다 닳지 못한 이기심이 조약돌이 되려고 몸부림친다.
살아온 날들, 살아갈 날들은 모난 돌을 짜 맞추어 둥근 탑을 쌓아가는 날들이다.
그 돌탑 맨 꼭대기에 갈고닦은 조약돌 하나 올려둘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 인생 아닐까.
남해와 동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부산 앞바다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댔다.
그 바람 속에 타이거 릴리들이 향기로운 꽃말로 소리쳤다.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 저녁 Sabor A Mi (나만의 향기, Kenny G 연주)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만난 참나리
해운대에서 만난 참나리
숙소 근처 바닷가에서 아침에 만난 타이거 릴리
이 바위벼랑에도 자세히 보면 주황색 릴리들이 자란다
둥근 조약돌이 되기 위해 애쓰는 날들...
썰물에 차르륵 차르르르~ 구르는 몽돌해변 파도 소리는 내 안에 모난 돌들마저 깎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