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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음, 여름

by 남연우


비낀 노을에 조개구름이 붉게 빛나는 여름 저녁은 끈적이는 열기마저 수긍하게 된다.

하루 일과를 마친 태양이 미끄러지기 직전 지상을 달군 복사열과 습기가 만나 저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냈으므로... 국그릇에 담겨 훈기를 내뿜는 저녁식사를 물린 뒤 창문에 기대 서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징징거리는 매미 소리도 정점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입추 전날 풀벌레 날개 비비는 소릴 처음 들었다.


비가 내리는 날들이 많아졌고 계절의 축이 모서리를 크게 돌아 가을로 향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여름과 가을 사이 이음새를 메우려고 비가 내린다.

여름에만 들고 다니는 나의 민트색 망사리 가방에 절반은 차고 절반은 빈 허전함의 정체를 뒤진다.

애정이 애증이 되어버린 내 고향이 담기지 않았다.

이 여름 고향의 모습을 담으러, 추억을 건지러, 나는 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신의 보양식을 먹은 나는 든든하게 다시 신념에 찬 삶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보자, 내 고향 여름은 어떻게 지내는지.




여름 추억 하나_ 열음, 여름


며칠 전부터 장만한 반찬을 아이스 박스에 빼곡히 담았다.

양념간장을 차곡차곡 끼얹어가며 눌러 담은 깻잎김치, 오이소박이, 꽈리고추 메추리알조림, 갑자기 가격이 뚝 떨어진 싱싱한 오징어로 담근 오징어식해. 생닭 전복 수삼 대추 찹쌀 쇠고기 무 버섯 찰옥수수 햇고구마 애호박 가지 복숭아를 빠짐없이 담았다. 수박 두 덩이도 샀다. 저번에 부산 갔을 때 모기 스무 방 물려서 모기장을 가져가야만 했는데 가져갈 식재료 신경 쓰느라 빼먹었다. 가는 길에 이불가게 들러서 구입했다.


주간돌봄센터(노인유치원)에 가있는 엄마에게 곧바로 갔다.

바닷가에 위치한 그곳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출입문을 밀자 어르신들이 박수를 치면서 율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출입구 근처에 앉아계셨는데 너무 열심히 동작에 몰입한 나머지 딸이 왔는지 눈치채지 못하셨다. 직원분께 수박 두 덩이를 건네고 잠시 서 있었다. '서프라이즈' 하면 더 놀라시겠지.

뒤돌아본 어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금자엄마다" 하신다.

딸 친구뻘로 생각하셨나 보다.

직원이 엄마등을 툭 건드렸고 놀란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선다.

"아이고, 우리 OO 아이가. 어째 왔노?" 하시면서.

다른 할머니들은 얼굴이 시커먼데 우리 엄마는 보얀 새색시 같다.

센터 출입한다고 사드린 꽃무늬 블라우스도 잘 어울리셨다.

하루 세끼를 여기서 드시고 잘 지낸다고 하시더니 얼굴이 무척 좋아 보였다.

엄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삼계탕 재료를 압력솥에 넣어 가스불에 올리고 불 끄는 시간을 오빠에게 알려주고는 저무는 들녘에 내려섰다. 생육으로 무성한 들판이 온통 초록색이다. 조금 더웠으나 이따금 산들바람이 귀엣말을 속삭이듯 살그머니 불어왔다. 군데군데 벼꽃이 피면서 낟알이 불쑥 자라 오른 모습이 눈에 띄지만 대부분 잠잠하게 생장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장기가 이토록 길 줄은 몰랐다. 새벽이슬 머금고 벼꽃이 필 무렵이면 벼꽃 향기가 십 리를 간다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잘 구획된 농로를 따라서 걷다 보니 도랑물이 졸졸 흐르고 민트색으로 예쁘게 칠해진 수문이 인상적이다.

윗부분에는 수문을 여닫는 핸들이 달려있는데 시운전을 하면 도랑물을 타고 그대로 바다로 흐를 것만 같다.

논배미에도 물을 여닫는 칸막이가 달려있어서 이제는 서로 논물을 차지하려고 언성 높이던 물꼬 싸움은 없겠다. 시골 농사도 참 세련되고 모던하다. 앉아서 보니 도랑물이 무척 맑다. 머리를 풀어헤친 물풀이 흐름을 따라 길게 너울거리고 고운 새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파란 물총새가 재빨리 날갯짓하여 사라진다.

물총새가 깃드는 도랑물 그리고 민트색 수문...

해 저무는 저녁 들판이 망사리 가방에 비어있던 공허감을 달래준다.


우렁이농법이 적용된 친환경지구 들판에는 새하얀 백로들이 날아들고 물이 넘치는 농로에는 우렁이들이 기어 다니느라 분주하다. 촉수를 내밀면서 길을 횡단하는 큰 어미가 보이고 그 주변에는 작은 새끼 우렁이들이 넘쳐난다. 콘크리트 도랑 벽에도 빼곡하게 붙어있다. 순간 여기가 바닷가 갯바위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뭇 생명들의 속삭임이 그득한 이 들판에 서면 지난 시간이 중첩된 자아는 여러 갈래 분열되어 따라다닌다.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사흘을 굶었던 나는 꽁꽁 얼어붙은 이 들판에 내려섰다.

생명이라곤 없는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오갈 데 없이 허허로웠고 마음에 달린 한 칸 쪽창은 겨울바람이 컹컹 짖었다.

추수를 마친 논펄은 굳을 대로 굳어 낫으로 베어낸 벼 포기들 사이로 얼음이 쩡쩡 얼어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겨울 햇볕이 노니는 얼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목하게 논물이 고인 얼음 테두리는 얕아서 투명한데 한가운데 얼음은 하얗고 두꺼웠다.

하얀 얼음과 투명한 얼음이 서로 교차하며 그려진 문양을 내 눈길은 어느새 흥미를 가지고 좇고 있었다.

그 패턴들 속에 예쁜 얼음꽃들이 피어있음을 발견하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 겨울 들녘은 얼음마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빛나고 있었다.


얼음꽃들이 속삭였다.

"이 버려진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있어.

한겨울에도 말이야.

그러니 힘내.

다시 도전하면 되잖아.

우리는 너를 믿어."

땅도 쩍쩍 갈라진 입술로 소리쳤다. 지금은 잠시 열정을 내려놓은 잠재기일뿐이라고.

다 내려놓은 듯 보이지만 이듬해 봄을 향한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노라고.

겨울 논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겼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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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추억 둘_ 바닷물 염도는 3.5%


뾰족한 머리를 내민 바위들이 물개처럼 떠다니는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빙산의 일각을 드러낸 바위 주변으로는 하얀 파도가 스러져 물거품이 인다.

팔다리를 휘젓는 물개가 헤엄치면서 내뿜는 물살 같다.

짙푸른 바다 연푸른 바다 검은 바위 황갈색 바위들의 다양한 생김새와 함께 역동적인 해류가 움직이며 전개하는 파노라마 그리고 파도소리 바람결 수평선이 한데 어우러져 여름이 가장 여름다운 여기는 해안 스카이레일.

떠밀려온 물결이 해안 경계선에 이르러 저항이 거세다.

격노한 파도는 갯바위를 때리고 포말이 부서짐과 동시에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서 부딪는다.

이중 삼중 겹겹의 파도가 레이스로 만든 프릴 소맷자락같이 흔들린다.


모래사장에서 바라보았다면 놓치고 말 바다의 표정들이 시시각각 다르게 전개되는 해안선을 따라서 포즈를 취한다. 어쩌면 바다는 내 카메라 셔터음 소리에 맞춰 턱선을 내렸다가 꼿꼿이 치켜들고 허리를 반쯤 비틀어 뒤돌아보다가 천만 개나 되는 다리를 바위 위에 턱 하니 들어 올리는가 하면 포복절도 읍소한다.

내 시선을 따갑게 찌르는 첨탑이 뾰족한 갯바위들은 내부에 금강석을 다져놓았는지 그 수많은 세월의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을 거부한다.

세월에 굴복 않는 저 집념은 서슬 푸른 바다라서 가능하지 않을까.


굳게 다문 저 바위도 깊게 들어가면 지구의 맨틀과 연결되고 그 안에는 지구 자기장을 생성하는 액체 상태 그 무엇이 된다. 바위는 펄펄 끓는 용암이 굳은 것이다. 너무 뜨거워서 너무 차갑게 굳어버린 그 무엇이다. 언젠가는 흐물흐물 녹아내릴 그 무엇. 그래서 저 바다와 잘 어울리는 것일까.

팽팽한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수평선도 밀어내버린 해안선이 이토록 경이로울 줄은 미처 몰랐다.

스카이뷰 바닷가에서 새파란 바닷물이 내 안으로 흘러 넘치게 들어왔다.

자반고등어처럼 소금에 절여진 나의 염도는 3.5%, 한동안 썩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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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추억 셋_ 불영사


매표소 건너편 카페에는 방이 있었다.

방바닥에 붙어있는 푹신한 소파에 엄마와 오빠를 데려다 놓고 시원한 음료를 시켜드렸다.

불영사 들어가는 길은 지난해까지 흙길이었는데 적황색으로 칠해진 포장길이 돼있었다.

흙길일 때가 운치 있어 더 좋았다.

바람길이 막힌 산중은 턱선을 지나 차오른 열기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흐름이 느린 계곡물도 더위를 먹었다.

열을 흡수치 못하는 포장길이 더위를 더 부추겼다.

나무 그늘을 찾아서 갈지자로 흐트러진 걸음이 맥없이 늘어졌다.


기억은 어느새 대학생이던 그해 여름으로 치닫는다.

고향에 내려온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다.

친구 서너 명과 함께 구불거리는 구불양장 불영계곡을 따라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여기 왔었다.

우리는 경내 오른편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으로 가면 불영계곡 깊숙한 비경 속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우리의 예감은 적중했다.

경내를 벗어나 조금 들어가자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흰 적삼을 입은 비구니 스님들이 하하 호호 물장난을 치면서 물놀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들어가서는 안될 금단의 구역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특별히 출입금지 푯말도 안 보였다.

지금도 두 눈에 아련한 스님들 모습은 신선세계에 사는 선녀들이 내려온 듯 선연하다.

우린 그 길을 지나쳐 더 깊숙이 들어갔고 곧 탁 트인 계곡이 나타나면서 둥글게 다듬어진 돌멩이 위에 앉아서 가져간 과자를 먹으며 얘기꽃을 피웠다. 그날 이후 불영사를 여러 번 찾아갔지만 우리가 갔었던 그 계곡으로는 두 번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왠지 가서는 안될 것 같았고 그날의 추억을 곱게만 접어두고 싶었다.


부처바위 그림자가 내비치는 연못에는 노랑어리연꽃이 부유하고 막 피어난 배롱나무 붉은 꽃잎들이 수면에 드리워진 흰구름 위에 살포시 떨어져 환상적이었다. 연못 위에 무심히 던져진 하늘에 백일홍이 피어난 불영사는 휴가철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양산을 쓰거나 부채를 손에 든 그들은 조용하게 경내를 거닐었다. 어느 누구 큰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마당은 정갈했고 대웅보전 부처님도 여성적이었다.


귀퉁이 깨진 고려시대 삼층석탑 옆에도 제철 맞은 백일홍이 시대를 거스르며 묘한 대칭 구도 서 있다.

백팔번뇌 껍질을 아프게 벗겨내며 뜨거운 태양 아래 묵묵히 수행하는 허리 굽은 노승의 그림자를 배롱나무 곁에서 엿보았다. 시간의 각도를 틀면서 염주알을 굴리면서 층층이 포개져 이끼 입은 석탑의 묵중한 증언을 엿듣는다. 붉은 피가 흐르는 살을 입고 잠시 서 있는 이 중생의 기원을 석탑은 알까?


살아온 날들이 많아질수록 간절한 염원은 까먹고 옅어져 하루하루 무사하게 살아감에 안도하고 감사할 뿐이다. 저 눈비 내리는 하늘에 대고 감히 새기는 염원이 있다면 나의 천성을 더럽히지 않고 데려가게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땀이 비 오듯이 맺히는 여름 한낮 그늘과 에어컨을 포기하고 불영사를 걷는다.

한 시간여 걸려서 매표소 돌아올 때는 몸에 풀기가 없어 고꾸라질 것 같았다.

시원한 카페에 들어서자 기다리다 지친 엄마가 꾸짖는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면서.

더위 먹은 머리가 띵해졌다.

엄마 맘이 풀리도록 불영계곡 아래 맛있는 밥집에 모셔가서 이열치열 뜨끈한 식사를 사드렸다.

맛집으로 소문난 그집은 때늦은 시각에도 여행객들이 북적였다.


이틀 연속 밤하늘에는 수많은 여름별들이 먹구름에 갇혀 두문불출했다.

그럼에도 달무리를 드리운 보름달이 간간이 나타났고 내 정수리 위로 별 하나가 반짝거렸다.

그 별은 나를 반겨주었다.

고향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알고서 두꺼운 구름을 걷어낸 용감한 별이었다.

그 별을 가슴에 품고 불면증으로 괴롭던 전날과는 다르게 푹 자고 일어났다.

동해에서 치솟은 불덩이 태양 앞에 가스불을 켜고 소고기뭇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고 가지나물을 무치고 자주색 빛깔 고운 햇고구마를 쪄서 한 소쿠리 담아내고 고향집을 떠나왔다.

떠나기 전 아버지 묘소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왔다.

묘소 앞 지난가을 심었던 국화가 새순이 돋고 자라나서 꽃봉오리가 맺힌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나의 망사리 가방 가득 이 여름이 선물한 추억들이 대롱대롱 맺혔다.

이제 마음 편히 보내줄 준비가 되었다.

뜨거운 태양을 마주 대한 2025년 나의 여름, 안녕, 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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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사리 가득 건진 나의 여름 추억들은 염도 3.5%, 알맞게 절여졌다.

썩지 않고 온전히 보관되어

두고두고

좋은 향기로 발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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