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지난 폭염의 기세가 맹렬하다. 전에는 열대야가 꺾이는 시점이 광복절이었다.
이제는 그런 약발도 듣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는 어느새 중병이 돼버렸다.
산유국에 의존하는 화석연료 소비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고 기후재앙으로 인한 폭염과 폭우는 더더 거칠어지고 있다. 지중해 인접 국가들의 기록적인 폭염은 조수가 없는 지중해 수면에 열기가 쌓이고 해수 위아래 층이 섞이지 않으면서 더 심화된다고 한다.
고온다습 날씨가 통점을 건드리면 피어나는 연꽃 또한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한발 늦게 찾아간 연꽃들은 대부분 지고 연밥이 맺혔는데 이제 피기 시작한 꽃들은 더위에 지쳐 꽃잎이 축축 처졌다. 사람도 꽃도 가장 예쁘게 피어나는 때가 다 있나 보다. 듬성듬성 핀 꽃들 사이로 껑충 자라 오른 초록색 어깨를 겹겹이 에워싸고 바람 따라 너울거리는 동그란 잎들이 서늘한 풍경을 열어준다.
희고 복슬복슬한 적운이 떠가는 하늘에 숨었다 나타났다 숨바꼭질하는 태양의 체온이 너무 뜨거워서 모기를 피한다고 입고 간 청바지가 척척 감겼다.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 얼굴에 솟아오른 땀방울, 나무 그늘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애써 화사한 얼굴을 들어 보이는 연의 거처에 대하여 생각했다.
저 질척거리는 진흙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연의 심정은 어떠할까.
태생의 그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꽃을 열어 보이기까지 참아낸 인고의 시간. 일단 질퍽거리는 습기에 썩지 않기 위하여 뿌리까지 관통하는 숨구멍을 냈다. 그곳으로 드나드는 공기를 심호흡하면서 태생의 악조건을 극복하였다. 마차 바퀴를 연상시키는 둥근 뿌리는 수분과 양분을 고속으로 끌어올려 태양열이 정점에 도달한 한여름 어른 얼굴만 한 백련 홍련을 피운다.
어떻게 피워낸 꽃들인데 여름 장대비는 가녀린 꽃을 가만두질 않는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빗줄기는 꽃잎에 내리 꽂혀 상처를 주고 단명을 부추긴다.
방패를 자처하는 연잎들이 호위무사 역을 수행한다.
방수 코팅된 우의를 입고서 꽃잎들이 다치지 않게 둥근 우산을 씌워준다.
연꽃들은 그 그늘에 숨어서 수분하고 씨앗을 맺는다.
연은 뿌리 꽃 이파리 열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군자의 도리를 다하는 연은 그리하여 지구상에 완성형 생명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옛 연못 퇴적층에서 발견된 아라홍련 씨앗은 칠백 년 뒤 물을 만나자 발아하여 투실투실한 요즘 연꽃과는 달리 신윤복 미인도에 나오는 여인처럼 여리여리하고 아리따운 꽃을 피웠다.
어떤 조직체의 목적달성과 개인의 활동으로 분주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도 일정한 거처에 몸 담고 살아간다.
귀소본능에 충실한 발바닥에는 빨판이 달려있어 초가삼간이어도 내 집 방바닥에 누워야만 안락감을 느낀다. 자신의 생존조건이 열악한 삶은 수렁에 비유한다. 그 수렁에 길을 내고 신선한 공기를 집어넣고 창의적 발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두 발을 빼내는 것이 모범적인 삶의 표본 아닐까.
작은딸은 방학 기간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온라인 장보기 물품들을 바코드 찍어서 배달 나가는 상자에 담는 일을 한다. 일곱 시간 서서 일하는 단순노동이다. 일이 끝날 때면 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청년은 자기뿐이고 대부분 40 50 여사님들이란다. 그들은 특유의 친화력과 동물적 감각으로 작은딸 호구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OO님 엄마는 복이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저녁에 집에 돌아온 딸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내 처지를 들켜버린,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부러워하는 나의 복된 자리 나는 얼마나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던가.
내 분에 알맞은 안분지족의 삶 누리면서 과욕은 부리지 않았다.
다만 익어가며 고개 숙일 따름이다.
지난 일요일을 끝으로 딸은 한 달 아르바이트를 마쳤다.
중간에 힘들면 그만둘 줄 알았는데 인내심이 진득한 편이다.
작은 직업의 세계를 경험한 딸은 그새 여사님들과 친분이 들어서 왠지 출근해야 할 것 같은 월요일 아침에는 울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에는 밥을 사주셨다는 주임님과 딸같이 챙겨주신 여러 사람들을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고. 졸업 후에는 여기로 취직하라는 말을 하고는 그거 악담이라면서 웃었다는 그녀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한 우물을 판 연꽃은 자연스런 결과물일 뿐 연의 내공은 널따란 잎과 뿌리에 근본이 서려있다.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는 뿌리의 근본, 번뇌와 오욕에 물들지 않고 둥글게 구슬려서 내보내는 연잎의 지혜.
그리하여 연은 고요함을 촉발한 무더위 속에 향기를 머금은 꽃을 피운다.
맑고 고요한 내 마음속에도 향기로운 연(蓮)을 피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