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매장에 가면 수없이 많은 옷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옷이 있다.
그렇다고 대번에 그 옷을 취하진 않는다.
집에 와서도 맴맴 맴돌고 이걸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구입에 적극적인 편이다.
겨울 코트는 롱코트, 하프코트 이미 여러 벌 있기에 구입을 망설였다.
색상은 미색, 아주 엷은 노란빛의 병아리 깃털을 붙여놓은 것 같은 그 옷이 자꾸만 생각났다. 꽃잎 진 민들레들이 홀씨를 달고 날아가서 부스스한 포자들을 포집해 놓은 것 같은 질감의 부클 소재 코트에 해빙기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입고 싶었는지도...
이 정도면 질러보는 것이다.
기다리던 택배상자를 열어 이른 봄을 입어 보았다.
나른한 봄날의 현기증이 일었고 옷은 기대한 만큼 딱 맞았다.
반품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안도와 함께 태그(Tag)를 살펴보니 작은 봉투에 넣어주는 여분의 단추가 보이질 않았다. 내가 아는 브랜드들은 단추가 달린 옷은 꼭 여분의 단추 주머니가 태그에 딸려 있다.
혹 빼먹을 수 있겠다 싶어 회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여분의 단추가 없다고 말했고, 상담직원은 저희 회사는 여분의 단추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군요." 전화를 끊고 나자 이상하게 어떤 믿음이 생겨났다.
흔히 두꺼운 모직 코트는 한 해 겨울 지나고 나면 큰 단추가 대롱대롱 실밥이 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놓치게 되는 경우 그 단추는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의류회사는 새 옷에 여분의 단추를 제공한다.
그런데 제공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단추가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단다는 얘기로 들렸다. 단추 하나에도 확신을 가지는 의류회사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브랜드 옷을 처녀 때 입었던 기억이 났다.
미색 린넨 재킷과 스커트 한 벌 짜리 옷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오뉴월 입기 좋은 옷이었다.
그날도 미색 린넨 재킷에 네이비색 실크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하의는 검정 스키니 바지를 입었었다.
신촌 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떤 여성이 갑자기 다가와서 말했다.
"혹시 포즈 좀 취해줄 수 있나요?"
"왜 그러시죠?"
"의상이 너무 잘 어울려서 사진을 좀 찍고 싶어서요."
특별히 신경 써서 입은 옷이 아니었기에 웃음이 났다.
"그냥 평범한 옷인데요."
"아닙니다. 이 엷은 노란색에 블라우스, 바지까지 색상이 너무 잘 어울려요.
메고 계신 핸드백도요. 잠깐이면 됩니다."
"어디에 쓰실 건데요?"
"길거리 베스트 드레서 취재를 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가려드릴게요."
이미 제지당한 걸음 살짝 웃어주었다.
아마도 그 무렵 떠나가는 봄빛을 입고 있어서 더 누군가의 시선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옷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근무를 마치고 직장 아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동료들과 먹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 다가오는지 떠나가는지 아무튼 겨울이 어정쩡 걸쳐있는 계절이었다.
그때 나는 겨울장미를 닮은 빨간 재킷에 기다란 검은색 펜슬스커트를 입고 푸른 끼가 도는 남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등을 살짝 건드렸다. 돌아보니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행들은 일본어로 말했고 그는 영어로 말했다.
즉슨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거였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신이 나서 거들었다.
"선생님, 얼른 찍어요."
떡볶이를 먹다 말고 얼떨결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들은 언덕 너머 호텔에서 골목길을 따라 내려온 것 같았고 관광을 온 일본인들이었다.
'아이참, 이놈의 인기.. 이젠 뒷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자고 그러네.'
"Have a nice day!"
돌아서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은 해프닝을 치른 그들은 떠나면서 손을 흔들었다.
인사동에 가면 꼭 듣는 말이 있다.
가게 주인들이 확인 또 확인하면서 묻는 말.
"일본인 아니세요?"
한국말하는 나를 두고 자꾸 되묻는다.
나의 어디가 일본스러운지 모르겠다.
전에 싱가포르 면세점 직원은 다섯 번 이상 되물었다.
일본사람 아니냐고. 그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여러 번 말하자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일본여성 특유의 꼼꼼하고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내 모습에서 보는 것 같다.
여분의 단추가 있으면 잃어버려도 불안하지 않다.
실밥이 풀려 대롱거려도 한 며칠 유예한다.
잃어버리면 새 단추로 달면 되니까.
반짇고리 들어있는 바느질 가방에는 지난 시간 구입한 옷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여분의 단추들이 빼곡하다. 조개단추 금속단추 나무단추 플라스틱단추 모양도 제각각. 그런데 단추를 잃어버려서 새 단추들을 단 기억이 없다. 결국 불안감을 잠재운 쓸데없는 단추들이었다.
오늘이라는 시간 뒤에 맞닿아있는 내일도 혹 여분의 단추로 여긴 건 아닐까.
당연히 뒤따라오는 여분의 내일이 있어 오늘을 대충 아무렇게나 막 소비하진 않았던가.
오늘을 잃어버려도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
의류회사가 제공하지 않는 여분의 단추처럼 내일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오늘이라는 단추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더 튼튼히 더 열심히 더 알뜰히 살아가지 않을까.
오늘의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는다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
불고기 양념을 재고 함께 넣어 먹을 야채를 한 봉지 따로 담고 미역줄기 볶음, 신선한 딸기, 엄마가 좋아하는 빵을 사서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모처럼 푹한 날씨 짐을 부치러 우체국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단추를 열었다.
똑딱이 단추라서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거실에서 키우는 철쭉이 동지 지나 따사로운 볕에 삐죽이 분홍색 입술을 내밀었다.
도대체 어느 곳에 저렇게 고운 빛깔을 숨겨놓았는지?
나도 저런 빛깔의 립스틱을 바르고 싶은데..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