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

by 남연우

1999년 이 무렵이었다.

즐겨 듣던 FM 라디오에서 새봄맞이 특집으로 봄과 관련된 자작시를 응모한다고 DJ가 말하였다.

심사는 유명한 시인이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몇 해 전 끄적거려 놓은 글이 떠올랐다.

일기장을 열었다.

3월 2일 작성한 일기인데 제목이 '봄을 기다리며'이다.

일기 같은 시, 시 같은 일기였다.


당시 2층 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었는데 창가에 비치는 햇살이 투명하고 영롱하게 반짝였지만 거리를 나서면 한강변 알싸한 꽃샘추위에 코끝이 얼얼하였다. 창가에 둔 시클라멘을 키우며 봄을 기다렸지만 거추장스러운 코트를 벗지 못했고, 춘삼월은 봄을 타는 봄처녀의 지루한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기를 거문도 바닷가 절벽에는 벌써 수선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소릴 듣고서 마음이 싱숭생숭 들떠 끄적거린 글이 '봄을 기다리며' 일기였다.

시 같은 일기는 술술 단번에 적어 내려간 글이었다.

문장을 가다듬는 미적 장치도 없었고, 거친 듯 순박한 마음이 순무처럼 씹히는 글이었다.

이것도 시가 될까?


아니면 말고 PC통신으로 교정도 없이 보내버렸다.

2월 2일 심사하는 날 내 일이 아닌 듯 편안하게 듣고 있었다.

어떤 청취자가 보낸 시를 집중 조명하였고, 시습작을 해온 그녀와 전화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1등상을 도맡아놓은 듯한 분위기, 나는 물 건너갔구나 낙담하였다.

3등 제비꽃상이 먼저 발표되었고, 2등 개나리상이 발표되었다.

이제 남은 건 1등 진달래상.


심사를 맡은 시인은 숨을 고르며 문득 코트 이야길 하였다.

자기도 아직 무거운 코트를 입고 있다면서.

'뭐지?'

뭔가 찌릿찌릿 느낌이 오던 순간 시인은 내 시를 낭송하였고, 뒤이어 내 이름이 1등 진달래상으로 호명되었다. 오글거리는 두 손이 어찌할 바를 몰라 비비적거렸고 귀에 걸린 입꼬리가 "어머어머" 감탄사 연발 혼자서 듣기 아까웠다. 이런 순간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세렌디피티, 뜻밖의 행운!


일기장 속에 묵혀있던 글을 시로 읽어준 그분이 내 마음을 예쁘게 봐주었던 거고,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FM 라디오 봄맞이 특집방송을 진행한 유열님이 있었기에 나는 시인의 작은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날 받은 박술녀 한복 상품권을 들고 군자동에 있는 가게로 가서 적자색 옷고름 달린 아이보리색 저고리에 작은 꽃들이 수놓아진 짙은 바다를 닮은 감색 치마 한복을 직접 주문해서 맞추었고 그 한복은 지금도 서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입춘 절기 봄을 조금씩 기다려봄직하지만 동장군의 기세가 맹렬한 오늘 <불후의 명곡>에서

병마의 긴 터널을 헤쳐 나온 유열님을 뵙게 되어 반가웠다.

나를 시인의 길로 이끌어준 분이기에 아프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많이 안타까웠다.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힘을 빼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안심이 되고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염원하였다.


그 시절 나는 봄을 많이 탔었지만 지금의 나는 색의 향연을 지우면서 뿌리만이 살아남은 무채색 겨울 그대로의 모습도 좋아한다. 차가운 대기를 건너와서 뾰족한 고드름을 깎아내는 햇살의 부드러운 입김을 좋아하고, 두꺼운 마분지 같은 어둠을 뚫고 늦은 밤 내리는 눈송이들이 첫새벽 새하얀 길 위로 걸어가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뒷짐 지고 따라가는 뽀드득 소리, 폭염의 대칭구도 한파의 절정에 이르러 지난여름의 이야기들이 거짓 같을 때 멀거나 가깝거나 어느 계절에 살건 우리는 태양의 노예들임을 수긍하게 된다.


황홀한 봄날을 기다리는 지금이 더 고요함으로 충만하다.

기다림은 또 얼마나 우릴 설레게 하는가.

여백을 간직한 그 이면 잘 알지 못해서 기대하게 되고 말이다.

봄을 기다리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잘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잘 안다.

우린 서로 기다란 하나의 끈에 묶여 서로 다른 운명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시를 잉태하는 이른 봄을 살아내었고 아픔에 서툴렀다.

지금의 나는 봄을 흠모하지만 그 기쁨이 전부가 아님을, 춥디 추운 이 겨울 또한 남모르는 인내의 결실과 봄을 향한 뜨거운 열망의 시간을 살아낸다. 그때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언젠가는 들뜬 희열과 이 언어조차 다 버려야 한다.





봄을 기다리며

_ 남연우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 하도 따뜻해 보여

드르륵 묵은 먼지 밀어내어 문을 열면

코 끝 아린 찬바람이

황급히 다가와 으름장을 놓는다


겨우내 입은 모직외투가 이제는 무겁다 싶어

얇은 옷 겹쳐 입고 거리를 나서면

두고 온 코트 장갑 목도리까지

눈앞을 맴돌며 아쉬워진다


신김치가 슬슬 입에 안 맞으면서

파란 월동추 겉절이가 삼삼해지고

우중충한 립스틱 대신

분홍빛깔로 입술을 화사하게 칠하고 싶은


추워서 입지도 못할 봄옷을

가끔씩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봄을 기다리는


자꾸만 서성거리며 기다려지는

봄,

새봄이여




순무같이 투박하고 아무 꾸밈없이

봄을 기다리는

봄처녀의 마음이 잘 스며들어 있다.

분단장하지 않고

얼굴의 실핏줄이 그대로 내비치는 시.

함박눈을 펑펑 맞으면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툴고 미숙했던 그때의 모습을 다시 사느니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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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인 줄 알았는데 세 개의 불꽃이 타오른다

요즘 이 꽃을 바라보는 기쁨이 크다

봄은 벌써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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