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Time Slip
시간은 기본적으로 미끄러운 성질을 지녔다.
살아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걸 보면 더 그렇다.
또다시 일력 한 장 뜯고 나면 끝나고 마는 한 해의 끝에 섰다.
누가 밀어내는 것도 아닌데 시간 스스로 바퀴를 달고 잘도 굴러간다.
어쩌면 우리가 재촉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떠밀며 가혹하게 내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모른 채 벨을 눌러 하차하는 사람을 향한 인사도 없이 욕망을 가득 태운 집단의식은 배려와 예의를 애써 외면하면서 시간을 재촉한다.
4세부터 영어유치원에 들어가는 아이들도 그 열차에 탑승 빨리빨리 배우기를 강요받는다.
'무한경쟁' 이름을 내건 그 열차의 가속도는 '패자부활전'이라는 재미를 모른다.
시간은 느긋한 곳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한적한 장소에 고인 평화로움은 시간을 해방시킨다.
하늘에 굴러가는 해와 달의 시간은 조바심을 모르지만 새로운 계절을 정확하게 데려온다.
싱싱한 새잎이 시들어 떨어지듯 나이 듦도 자연의 시간에 맡기면 저절로 철이 들리라.
더 큰 성장을 위하여 하나의 세포가 사멸하는, 우주의 법칙을 기꺼이 수용하리라.
숫자로 매겨진 분침과 시침은 지금 이 순간을 향할 뿐인데 쌓여만 가는 '어제'라는 퇴적물은 과거로 물러서서 후회를 남기고 오지 않은 미래는 불안을 조성한다.
걸음을 떼는 지금 이 순간에만 몰입할 순 없는 걸까.
후회와 불안에 에너지를 빼앗기면서 어떻게 온전히 지금을 살아낼 수 있을까.
미끄러운 시간의 속성을 뒤로 돌려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은 추억뿐이다.
아름다운 시간을 살아낸 추억만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마법을 선사한다.
선한 마음으로 물든 추억은 힘든 시간을 살아가면서 꺼내 보면 든든한 위안이 되는 시간의 선물이다.
내 마음의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추억상자는 변색을 모르는 오르골 리듬이 되어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시제에 몸 담고 살아가는 내 마음 상태를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괴로운 시간만은 되지 말아야겠다.
누가 시비를 걸어와도 잘 이겨내고 마음을 잘 다독인다면 시간의 반전은 멋진 선물을 준비해 두리라.
임대인이라는 이유로 지난 몇 달간 힘들었다.
며칠 전에도 그 일로 감정소모가 심해서 많이 힘들었다.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인해 그 동네 산에서 내려온 산바람이 몹시 춥게 느껴지던 나에게 누군가의 향기로운 시 한 편이 꽃잎처럼 사뿐히 날아들어 힘이 되어 주었다.
허기를 채우려고 칼국수 몇 가닥을 삼켰지만 입맛이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계산대에 다가가자 "왜 이렇게 많이 남기셨어요?" 가게 주인이 물었다.
"입맛이 없어서요."
"왜 입맛이 없어요?"
"오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요."
"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인자하신 식당 아주머니는 내 안색을 살피며 계속 물었고 일이 잘 해결되길 바란다며 쓰라린 내 마음을 살며시 터치해 주었다.
이대로 돌아가긴 헛헛해서 예전 알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일같이 달려와 주었다.
그녀에게 속상한 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사람에게 다친 마음 사람에게 위안을 받았다.
양지와 음지를 오가며 어수선했던 2025년.
나를 더 성장시키려고 불편한 돌밭을 잠시 걸어왔다.
누군가에게 맞은 돌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진 않다.
조용히 거두어들인다면 그 돌은 내공을 쌓는 고임돌이 될 것이므로.
타임 슬립 시간이여, 천천히 가라.
내 고삐를 잡고 서서히 풀어줄 것이니 서둘러 앞서지 말라.
어두운 밤길에는 손전등을 비추어 어둠을 밝히고 찬란한 별빛에 의지해 길을 나설 터이니.
언젠가 그대가 마련해 둔 기한이 끝나는 날에는 이 몸 스스로 빛이 되어 저 먼 우주로 날아갈 터이니.
그때 나는 진정한 시간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