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남연우
청사초롱 비춰 들고 돌담길을 걷는다
오얏꽃 만개한 봄밤의 옛 향기
기억 속으로 더듬어 가는 길
담쟁이 늙은 손이 가리키는 고택 담장 너머
가야금 풍류 한가락 엿들었는데
정동극장 뜰 안에는 북춤이 한창이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시월 밤 한기처럼
차갑고도 시퍼런 근대화의 새 물결에
적잖이 놀란 구한말 사람들은
빨간 벽돌집을 짓는 색목인의
갓 대신 모자를,
버선 대신 양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갈아치우는
개화기의 밤은
왜 그리도 깊고 어두운지
곤두서는 낯섦에 대하여 백구가 짖어대고
아낙네 다듬이 소리에
대한제국의 멍 푸른 새벽은 더디게만 오려는지
밤늦도록 마신 양탕국 때문인가
*양탕국: 구한말 커피를 부르던 이름, 서양에서 들어온 탕이라는 뜻.
2016년 10월 서울 중구에서는 "정동 야행"이라는 가을 축제가 있었죠.
청사초롱을 들고
어둠을 밝혀가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밤!
정동극장 뜰 안에는 국악공연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오얏꽃 만개한 봄바람이 시간의 장막을 비수로 찢어
휙- 불어왔습니다.
뉘 집 고택 담장 너머에선
농익은 가야금 풍류 한가락 들려옵니다.
머리에 초립을 쓴
구한말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가마에 태워
그 시대 으슥한 골목길로 데려가는
시공간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등잔불이 타오르는 밤.
촛불 심지는 짧아지는데
개화기의 시퍼런 칼날이 새벽빛을 부르는데
낯선 낌새를 알아차린 백구가
허공을 향해 자꾸 짖어대는데
서민들은 먹고살기 바빠 동동거리고
양반들과 위정자들은
주색에 빠진 건지
술잔 부딪는 소리만이 흥청망청 담장을 넘습니다.
법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해괴한 음모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요즘
대한민국의 시계가 고장 난 건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건 왜일까요?
어떤 사람들의 의지로 고장 난 걸까요?
성공한 사업가이자 황세손으로 지명된
앤드루 이씨가 미국에서
대저택을 매입하였다는 기사가 뜨고,
중국 무인탐사선 창어 5호가 무사히 달 착륙에 성공한 뒤
달 표면 샘플 채취 작업에 돌입했다는
2020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