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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an 03. 2021

신축년 흰 소의 해, 이중섭 어게인


덕수궁에서 기다리는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흐린 하늘을 유혹하는 능소화들이 색 고운 주황색 물감을 짜내어 장마철 습기를 괴어 놓습니다. 버스를 타고 을지로 입구에서 하차하여 시청광장을 가로질러 갑니다. 미리 예매해놓은 입장권을 내밀고 궁궐 안으로 들어서자 회색 도시의 소음은 돌담길 바깥으로 물러나고 고즈넉한 흙길 위로 눈 밝은 초록 그늘이 먼저 다가와서 반가이 손 내밀어 맞아줍니다. 


이렇게 혼자서 한 남자의 예술적 자아를 만나러 가는 일은 얼마 만인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설렘이 기웃거립니다. 빙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내면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예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약속 장소인 보라색 표지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보입니다.


상아색 계단을 한 칸 두 칸 오를 적에는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발을 헛디딜까 조심하였답니다. 넉넉하게 약속시간을 잡아놓으신 당신께서는 검은 재킷에 베레모를 쓴 모습으로 태우지 않은 긴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0년 전부터 줄곧 그 자리에 앉아 기다려온 모습이었지요.

대표작 황소 그림과 함께.


툭 건들면 먼지가 되어 뭉개질 것만 같은 낡아버린 구두가 당신의 인내심을 말하여 줍니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림으로만 대화하는 당신의 침묵을 지금부터 무채색 슬픔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벌거숭이 아이들이 어느새 달려와서 물방울을 튀기며 내 손목을 잡아 끕니다.

쾌활한 아이들을 따라 여름 바닷가로도 나가보겠습니다.     


▷ 세 사람

     

비좁은 공간에 웅크리거나 엎드리거나 드러누운 세 사람이 먼저 나타납니다.

제각기 자세는 다르지만 잠을 자는 것처럼 이완되거나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다.

의자의 균형을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개의 다리가 필요하듯 공간의 구도상 매우 안정적인 세 사람의 위치는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웅크린 채 두 팔을 포개고 앉아있는 사람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 중입니다.

타의로 꾸며진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안을 강구하는지 적당히 구부린 관절의 각도는 체념을 거부합니다. 맨 앞에 드러누운 사람의 왼손이 저항하듯 손아귀를 움켜쥐려 합니다. 바로 강력한 의지로써 붙잡을 수 있는 희망 아닐까요. 곧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생각한 대로 행동을 개시할 작정이겠지요.

횃불을 들고 암울한 시대의 절망을 비춰나갈 것입니다.     


▷ 묶인 새


형틀에 앉아있는 새 한 마리 양쪽 날개 아래 무거운 돌을 매달아놓았습니다.

날개를 구속당한 새는 풀려나면 다시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지만 이 새는 황새처럼 기다란 목에 목숨줄을 위협하는 노끈이 관통되어 있습니다.

가까스로 풀려나더라도 새는 날아오르기는커녕 피 흘리다 죽을 것만 같습니다.

새의 상징은 날개이고 날개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날개보다 치명적인 새의 목숨을 노린 자는 누구일까요. 화가는 예술가로서의 자유의지 이전 생존의 처절함을 새의 상처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구릿빛으로 검붉게 그을린 아이들이 희푸른 파도를 타며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물고기들과 함께 놀고 있어요. 미끄덩거리는 비늘을 놓치지 않으려고 질끈 눈을 감은 아이들이 있는 힘을 다해 물고기 몸통을 부여잡습니다. 빠져나가려고 꼬리 치는 물고기도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만 올라탄 아이 기세에 눌려 꼼짝 못 할 뿐 두 마리는 필경 바닷가에 선 아이들을 놀려주고 푸른 물살 속으로 유유히 헤엄쳐 사라지겠죠.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물고기의 유연한 몸짓이 화사한 색채와 더불어 화면 가득 꿈틀댑니다. 

바라보는 입가에도 여름 파도 같은 미소가 샐쭉 오르내립니다.     


▷ 두 아이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불과했던 은지는 화가의 탁월한 선택으로 인해 세상에 둘도 없는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은지의 빛깔은 밤하늘 별빛을 긁어모은 듯 특별합니다.

바스러질 것 같은 빛 떨기 속에 살짝 패는 선을 그리고 채색을 하여 닦아내는 상감기법을 적용한 당신은 벽화를 그리는 심경이었다지요. 정겹게 포옹한 두 아이의 모습을 당신은 드론을 띄워놓은 듯 입체적인 공중 시각으로 그려내었습니다. 빈틈이라곤 없는 두 아이의 마주 포갠 품에서는 따스한 인정의 꽃이 피어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평온한 모습에서 오래 떨어져 지낸 상봉은 아닌 것 같아요. 

형제애를 나누는 일상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포옹, 우리 정서에는 조금 낯선 포근한 마주침을 이 아이들처럼 자주 하게 된다면 행복은 체온이 흐르듯 옷 속으로 파고들어 떠나지 않겠지요.

손가락을 세워 빙글빙글 날고 있는 잠자리를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아이, 동심은 이런 건가 봅니다.    

▷ 길     


앙상한 나뭇가지가 창백한 겨울 하늘에 금을 긋는 화면 정중앙 매듭 풀린 실오라기 같은 황톳길이 동산 뒤로 굽이쳐 돌아갑니다. 길 아래 선 세 사람은 저 언덕길을 올라가려고 발꿈치에 힘을 잔뜩 주고 있습니다. 화가의 의도로 봐서는 분명 내려오는 사람들 같진 않습니다. 경사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은 동시에 내리막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길은 걷는 자에게 공평합니다.

비록 멀고 먼 길일지라도 오직 한 걸음으로써 헤아려지고 완성되므로 더욱 그렇습니다. 

수평구도 파란 바다를 향해 금세 쏟아져 내릴 듯 소낙비 가득 담은 흙탕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수직으로 난 길. 머릿 짐을 인 채 저 힘겨운 언덕길을 올라서 한 바퀴 허리춤을 돌아가면 그리운 아이들이 시장 갔다 오는 엄마를 눈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멈춘 듯 걷는 어제와 오늘의 인생길 그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 황소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선 황소는 뭉크의 절규처럼 외칩니다.

바탕색의 붉은 기운은 황금빛을 발하는 황소의 골격을 반사시키며 힘을 북돋워주기에는 불안한 색조로 내비칩니다. 황소가 내뿜는 에너지가 워낙 강렬하여 노을이 검은 어둠으로 스러져도 이상한 잔여물을 남기지 않습니다. 황소의 운명은 붉은빛으로 치닫는 순간 비장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황소가 제일 싫어하는 붉은색을 대비시켜 애절하게 포효하는 심경을 화가는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6.25의 비극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민족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황소의 유순한 눈망울이 슬픈 저항을 외칩니다.


▷ 부부     


새 두 마리가 동트는 새벽 긴 입맞춤을 합니다.

동녘의 붉은 색채가 일출을 암시하고 있고, 수평으로 일렁이는 푸른 선율들은 두껍게 칠해진 뒤 긁어내는 마티에르 기법으로 속 깊은 바다의 물살이거나 시시각각 어둠이 물러가는 대기를 잘 짚어내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에 깃든 사랑은 호모사피엔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미물도 미시적 세계에서 그들만의 사랑을 속삭입니다.

공중에서 거처하는 새들은 날아다니면서도 사랑을 합니다. 날개를 퍼덕이며 척추를 꺾어 오직 사랑에만 몰입하는 이 순간 새벽의 푸른 고요마저 잠시 침을 꿀꺽 삼킵니다. 지구 상 생물들의 영원한 코드, 사랑!

온유하여 머무는 자리마다 평화가 깃듭니다.


▷ 길 떠나는 가족     


피난길 잿빛 여명 속으로 굴러가는 소달구지 바퀴는 일출을 준비하는 둥근 태양을 닮았습니다. 가족을 태우고 소 고삐를 잡아끄는 아버지는 한 팔을 높이 들어 "이랴" 외칩니다.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납니다.

푸른 치마를 입고 엉거주춤 앉은 어머니 또한 설레기는 마찬가집니다.

제발, 추위도 배고픔도 걱정하지 않는 남쪽으로 가닿길 소망합니다.

변변한 보따리 하나 없이 가벼운 꽃잎만 얹어서 길 떠나는 가족에게 누가 보금자리를 내어줄까요. 

깃대처럼 들뜬 가장의 손짓이 왠지 공허해 보입니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남쪽 나라 끝 제주에서의 삶은 가난하였지만 이 가족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제주의 맑은 바닷물을 헤쳐 물고기와 게를 잡고 아이들은 배고픔도 잊은 채 추억을 낚아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겠죠. 그의 아내 이남덕 여사에게도 선물처럼 포장된 남쪽의 따스했던 기억이 잊힐 리 없겠지요.


▷ 소

     

1955년 작품 소는 이전의 소들과는 달리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화면 오른쪽으로 향합니다. 소의 상징인 뿔에서부터 이마에 이르기까지 붉은 피가 흘러 바닥에 흥건히 고입니다. 고개를 숙이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소는 목적지에 이른 듯 이제 몇 걸음만 앞에 두고 있습니다.

비쩍 마른 몸에 마지막 힘을 실어 앞으로 나아가려고 뭉친 어깨와 앞다리가 잔뜩 수축되어 있습니다.

아픈 소가 향하고 있는 이 길은 가족이 기다리는 집이 아닙니다.

소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돌아갈 곳 없는 소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이제 그만 멈추게 하고 싶습니다.

피 흘리는 상처를 보듬고 잘 먹여주고 재워주고 싶은데 소는 끝내 커다란 눈을 감아버립니다. 1956년 마지막으로 그린 화가의 소는 회색이 되어 불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 나무와 달과 하얀 새   

  

몽환적인 이 그림은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합니다.

현생에서 다음 생으로 건너가는 길목에는 검은 나무에서 먹고 자는 흰 새들이 메신저이자 사신 역할을 합니다. 기구한 생을 마친 한 많은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새들은 이 풍경에서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짐짓 딴청을 부리다가도 저 멀리서 주인공이 나타나면 한데 모여 길 안내를 하지요.

회색 기운이 감도는 달빛은 매일 보름달로 떠서 길을 잃지 않을 만큼의 시야를 확보해줍니다. 물기라곤 없는 척박한 땅에서 검은 나무들은 자라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없는 자라지 않는 나무들 역시 가야 할 길에 대한 원근감을 제시하고자 서있을 뿐입니다. 이제 저기 서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지나 큰 강에 이르면 다시 못 올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화가로서의 삶, 작별을 고합니다.


▷ 돌아오지 않는 강     


1956년 3월 원산 일대에는 연일 폭설이 내렸다고 신문들은 전합니다.

북에 두고 온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머니 생각에 고단한 화가의 몸은 더 만신창이가 됩니다. 

소년으로 돌아간 그는 푸근한 어머니 품이 몹시 그립습니다.

함박눈이 털 뭉치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날 소년은 눈 구경을 하다가 창가에서 깜박 잠이 듭니다. 펑펑 그칠 줄 모르는 눈은 푸른 어둠 사이로 길을 내며 나리고, 어머니는 지친 소년의 곁으로 눈길을 헤쳐 다가옵니다. 얼마나 서둘렀던지 엄동설한 두 팔을 걷어붙이고 광주리를 인 채 다가옵니다.

소년은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곧 만나야 하니까요.     



당신이 관람실 끝방에서 두어 시간 기다리는 동안 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 제주, 통영, 왜관, 정릉에서의 당신 모습들을 알게 되어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번뜩이는 직관력으로 파악한 해부학적 골격을 힘찬 선으로 하여금 형태미를 추구한 당신의 그림은 인상파 화가 고흐를 떠올리게 하지만 훨씬 더 부드럽고 정감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에게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쓴 손글씨와 편지 그림은 당신의 자상한 속마음을 엿보게 해주었답니다.


벌거벗은 아이들에게 가식의 덧옷을 입히지 않은 것처럼 한 여인을 향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다정한 아버지, 치열했던 화가로서의 열망을 모두 실현시킨 순수함이 모순이었다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한 무능함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당신에게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함은 크나큰 수치요, 자괴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만을 상상하면서 버텨온 날들에 대한 보상이 싸늘한 시선으로 되돌아왔을 때 격조 높은 당신의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자유로운 날개를 접어 숨통마저 조여 오는 고통은 곡기를 끊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많이 아파한 당신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어 찾아온 어머니는 꿈길을 걸어 먼 데서부터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떡과 주먹밥이 담긴 광주리를 이고 당신이 쓰러져있는 방 문턱을 살며시 넘어오고 있습니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 흰 새들이 검은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경계를 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당신을 세상이 이제야 환호를 보내고 장미꽃을 선사합니다. 낡은 구두끈을 고쳐 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흑백 사진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이중섭, 당신이 관람객을 안내할 차례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줘서 고맙습니다.

살아있다면 100세가 되는 2016년! 

길 떠나는 가족과 함께 황소가 이끄는 소달구지를 타고 덕수궁에 나타난 당신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정직한 화공입니다.      


     


                   2016년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전시회 관람 후기


                        **그림>> 네이버 미술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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