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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l 21. 2020

흔들리는 불빛

밤길을 걷다가

여름은 태양과 숨바꼭질하는 계절이다. 지상의 그늘을 요리조리 핥아버리는 시뻘건 술래 눈을 피해 숨기에 급급하다. 거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인들이 오가고, 정수리가 뜨거운 한낮의 나무들은 가장 깊은 그늘을 만들어낸다.     


저녁을 일찌감치 해결한 사람들은 해거름 녘 슬슬 몸을 풀러 바깥으로 나온다. 아무도 보는 눈이 없는 어둠을 틈타 자신의 뱃살을 덜어낼 요량인데, 문제는 가로등이다. 


LED 램프로 갈아치운 가로등 불빛이 어찌나 밝은지 벽돌책 한 권 들고 서서 독파하기 좋은 독서실 분위기를 나방들은 꺼리는 눈치다. 한 마리도 얼씬 않는다. 미친 듯이 원을 그리던 불나방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적당히 실루엣을 감춰주던 이전 불빛이 좋았다. 은은한 등불 같은 불빛 아래서 마음 터놓고 머리를 긁적여도 어색하지 않았는데 백색 파리한 불빛은 신경과민증에 불면증 얼굴이 떠오른다. 걸어가는 앞사람 체형을 그대로 스캔하는 대낮 같은 밤, 배불뚝이 아저씨들도 신경 쓰이는지 길가 어둠 진 데로만 골라 걷는다. 

     

최근에 나는 히말라야 신루트를 개척하듯 밤에 걷기 좋은 새로운 길을 발견하였다. 나의 신루트에는 공원이 세 번 등장한다. 먼저 집에서 나가면 느티나무가 도열해 있는 첫 번째 공원이 나타난다.  

    

울창한 나무들이 수목 터널을 만들어 둔 벤치에서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이 공원은 남향 하늘이 시원하게 탁 트여서, 보름달과 화성을 관찰하기 좋은 우주 전망대 구실을 한다. 

    

공원을 기역 자로 가로질러 쭉 걸어서 육교를 건너가면 두 번째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은 작은 운동장이 딸려 있어서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빙빙 돈다. 여기를 스치듯 지나 횡단보도를 건넌 후 아파트 사잇길을 100M 직진하면 피톤치드 함량이 높은 마지막 공원을 두어 바퀴 돌아서 반환점을 찍고 다시 되돌아온다. 

    

밤길을 걸을 때 내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은 견공들이다. 목줄 길이는 대략 1.5M(?) 내외, 얘네들이 자유로이 활보하면 지름 3M 영역이 생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촐랑대는 강아지 걸음이 신경 쓰여서, 두 눈에 서치 라이트를 켜고 걷는 밤길조차 편안하진 못하다.    

 

어둠을 고요히 사르는 촛불 같은 삼나무 길이 놓인 세 번째 공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나는 이곳이 금세 좋아졌다. 무엇보다 내 시야를 사로잡은 건 큰 야시장이 들어선 듯 휘영청 밝은 불빛이 먹물을 가득 머금은 공원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돈 한 푼 없이 맨손으로 길을 나선 나도 그 불빛에 이끌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야시장 구경이나 실컷 하고 싶었다. 행인들을 빨아들이던 그 불빛의 정체는 가게였다. 키 큰 나무 그림자에 가려진 가게 상호는 ‘아침마당 슈퍼’. 아침보다 밤 마당이 더 그윽하고 밝은 가게였다.  

   

바깥으로 잘 차려진 진열대에는 수완 좋은 주인장이 데려온 온갖 제철 과일이 넘쳐났다. 왼편에는 그 밤 다 팔려나가지 못할 수박들이 차떼기 채 쌓여있고, 우측에는 참외 자두 복숭아 옥수수들을 무더기무더기 쟁여놓았다.  

   

대형마트 잘 포장된 소량 과일들만 보고 고르던 내 눈에 획기적인 진열 방식이었다. 입안에 단물이 줄줄 고이면서 그 푸짐한 양과 때깔에 압도되었다. 한참을 걸어온 터라 시장하기도 했다. 카드 한 장 안 가져온 빈 주머니를 책망하다가, 봉지봉지 싸들고 갈 자신도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이나 밤길을 걸어가서 이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배고픈 아이같이. 가난한 자취생 신분이던 대학생 시절, 살던 집 주변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겨울철 비닐 덧문 고인 틈으로 붉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앞을 지날 때 그 흔한 밀감이나 단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빵을 외면했었다.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사람은 식욕이 왕성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그 허기증이 도진 걸까. 대형마트 카트를 채우고도 느끼지 못했던 허기를 이곳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저번에는 아침마당 슈퍼를 찍고 돌아서는데 한 손에는 옥수수를, 다른 한 손에는 자두 봉지를 들고 가는 어느 장년층 부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게 되었다. 잠시 내 옆에 부재중인 남편의 빈자리를 아쉬워한 건지, 그 부부의 온정 넘치는 일상을 부러워한 건지……   

  

지난 주말에는 기어이 그 근처 차를 대놓고 눈독 들이던 자두 한 상자를 실어왔다. 분이 묻은 새빨간 자두를 한입 깨무는 순간 아삭하고 달콤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다 누리고 삶에도, 어쩌다 마주치는 따스한 불빛에 몹시 흔들릴 때가 있다. 강가 떠밀리는 나룻배처럼!              


 



                                         "첫번째 공원 칠엽수 아래서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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