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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물 Mar 31. 2023

제대로

몰입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괜찮아. 쉬면서 해”


팍, 김이 새고 말았다.


첫째를 낳고 나서, 논문을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아기는 아기대로 잘 키우고 싶고, 공부는 공부대로 잘하고 싶으니 전투력 만렙이 되어 열을 내고 있던 시기였다. 밤에 아기를 재우며 깜빡 졸다가, 늦은 밤에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글을 봤다. 내가 공부하러 나올 때쯤 남편은 자러 들어가면서 늘 커피를 한 잔 내려주었는데, 그러면서 꼭 이런 말을 덧붙였다.


“쉬엄쉬엄 해”


물론, 이 말은 나를 위한 말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는 몰입해야 했다. 설렁설렁해서는 절대로 끝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그냥 ‘열심히 해, 파이팅!’ 해주면 더 힘이 날 것 같아.”


어떤 때는 ‘일단 해보자’ 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부담을 덜어주는 마음 가짐이 필요했고, 어떤 경우에는 ‘할 거면 제대로 하자’ 하며 집중하고 몰두하도록, 그래서 도전적인 과제를 거뜬히 해내게 만들어줄 포부가 필요했다.





고등학생 시절, 엄마는 내 방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나무랐다.


“얘 방이 이게 뭐니, 이런 방에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겠니? 정리 좀 해라”


나도 방이 지저분하다고는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몇 주째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서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간신히 씻고 자면 피로가 다 풀리기도 전에 아침이 밝았고 부랴부랴 씻고 아침을 마시듯이 먹고 집을 나서면 또 맨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짜인 시간표대로 갑갑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와 방 문을 열고 작은 나의 공간에 들어오면 무언가 안정이

되었다. 여러 물건들과  정리되지 않은 채 널브러진 책들로 어지러운 내 방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한번 슥 방을 둘러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 물건들은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물건들을 그냥 아무렇게나 두면서 나름대로의 자유의지를 나타낸 것이었을까.


“엄마, 나는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가야 하고, 밥도 공부도 다 정해진 대로 해야 되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이 방 밖에 없어. 나는 이걸 어지럽게 늘어놓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야. 이래야 내일 학교에 또 갈 수 있어.”


이 말을 하면서도, 엄마가 받아들여줄라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래 알겠어” 하고 방을 나갔다. 다행이었다.




설거지를 할 때는 도무지 대충이 안 된다. 대충 씻어 놨다가 음식 찌꺼기가 그릇에 남아 있으면 어쩌나. 잘 모른 채로 다음에 그릇을 쓰려고 보면 말라 붙어있는 음식물 잔해를 마주해야 하는데, 아무리 내가 썼던 그릇이어도 퍽 비위가 상한다.


설거지 거리가 쌓여있는 싱크대 앞에 이제 서서, 고무장갑을 끼며, 좀 뜨신 물을 틀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며 딱 설거지를 시작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는 ‘자 제대로 해보자’ 하는 열정이 생긴다. 안 하고 쌓아두면 모를까, 일단 하기로 하고서는 설거지는 대충 할 수가 없다. 꼼꼼하게 그릇을 부시며 깨끗해진 그릇을 선반에 차곡차곡 놓으며 나도 목욕한 것마냥 산뜻한 기분이 든다.




제대로 하든 대충 하든,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삶의 무게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줄 것이 필요하다.

섬세한 설거지와 대충 어지러 놓은 방은 사실상 둘 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어떤 것이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도구를 골랐으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너무나 많은 일이 주어졌다고 여겨질 때는, 아무렇게라도 하자며 일단은 살아가는 것이 좋다. 지금 집중해야 할 한 가지가 뚜렷이 보인다면, 그때는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힘을 넣어야 하는 때이다.



오늘은 ‘제대로’가 도움이 되는 날이다.


‘야, 한번 제대로 해보자’ 하며 내적 기합을 넣고 간다.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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