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물 Mar 24. 2023

수고

시간을 들이는 일

곰국은 들통에서 밤새도록 끓었다. 

엄마는 새벽에도 한 번씩 나와서 곰국이 잘 끓고 있나 살펴보시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 겨울방학 때의 익숙한 풍경이다. 방학이라 느지막이 일어나 부엌에 가보면 엄마는 큰 들통을 힘겹게 기울이며 곰국을 거르고 계셨다. 


뜨뜻한 방에서 한참 티비를 보고 있다 보면 엄마가 곰국을 국자로 세 번 먹으라고 들고 오셨다. 약이다 생각하고 먹으라 하셨다. 고소하고 따뜻했다. 

다 크고 결혼하고 보니, 사골을 직접 사다가 곰국을 끓인다는 건 어지간히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수고로운 것은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나는 많은 것을 귀찮아하는데, 어쩌면 내가 귀찮아하고 수고하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수고해서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했다면 그것은 뒤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무언갈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내가 들인 수고에 대단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내가 수고를 하는 원동력도 수치심 때문이고,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수치심 때문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어느 시기에는 책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드라마나 영화도 잘 보질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집중해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힘이, 흥미가 도저히 생기질 않았다. 

해야 할 일들만 했고, 겨우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마도 마음이 좀 지쳐있었던 상태였나 보다. 그래서 한동안 즉각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들에만 몰두했다. 


정말로 지칠 때는 나를 위해 가지는 시간마저도 힘들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성찰적인 성향 탓에, 내면을 살피고 나의 감정이나 필요를 잘 알아차렸다. 그래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문구 따위는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아주 잘 사랑하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것과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였다. 나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 나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나에게 수고는 수치심의 언어였다. 어릴 때부터 주어진 과업들을 하나씩 완료해 오며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는 일들은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안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은 것이 수고였다. 


그렇지만 엄마의 곰국, 그러니까 엄마의 수고는 사랑의 언어였다. 아껴주고 사랑해 주고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랑의 언어로 수고하고 싶다. 예전에는 원대한 결과를 원해서 수고했다면, 이제는 하나하나 나에게 주어진 작은 것들에 시간을 들여 윤을 내는 수고를 하고 싶다. 


‘시간이 드는’ 일을 하는 수고 말고, 내가 자발적으로 기꺼이, ‘시간을 들여서’ 수고하고 싶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기쁨도 오롯이 내 것이 되겠지. 나도 엄마처럼 따뜻한 곰국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요즘 차를 즐겨마신다. 차를 우려낼 때, 처음 우린 물은 버리고 두 번째 우린 물로 차를 마신다. 뜨거운 물을 찻잎에 부으면, 사실 한 번만 따라도 차가 된다. 


그렇지만 굳이 두 번 우린 물로 차를 마신다. 그게 더 그윽하고 맛 좋은 차가 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는 이 짧은 시간에도 더 맛있어지려면 약간은 수고로워야 한다. 


얼른, 대충, 무심히 해서는 깊음을, 아름다움을 누릴 수 없다. 그게 이치이고 공평한 일임을 점점 깨달아간다. 


시간을 들이는 수고는 사랑과 같은 말이었다.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