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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antino Jul 14. 2023

사북 사태의 현장을 걷다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


     사북 사태는 1980년 봄의 일이니 기억하고 있는 이가 많지 않다.   하지만, 잭팟을 고대하는 강원랜드 고객들이나 겨울철 정선군 고한읍의 스키장을 찾는 관광객들은 알게 모르게 사북 사태의 옛 현장을 걷게 되는 셈이다.   사북역에서 강원랜드로 올라가는 길의 왼편에 보이는 거대한 권양기는 이 지역이이 예전에 탄광 지역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면서 탄광 지역 경제를 떠받치려는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카지노와 스키장, 골프장이 태백 탄광촌에 들어서게 되는데, 태백 지역의 폐광이 한 두 곳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정선군 사북읍이 수혜를 받은 데에는 1980년 사북 사태의 영향이 컸다.  그만큼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사북 사태는 정선군 사북읍에 있던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의 광부들의 노동 쟁의로부터 촉발된 사건이다. 사북읍의 안경다리를 바리케이드로 하여 대치하던 노동자 측과 진압 경찰 간의 폭력사태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와 구속자를 낳았던 1980년 봄의 불행한 사건이었다.   다이너마이트를 쌓아두고 써야 하고 기간 철도를 품고 있는 광산 현장의 특수성에 비추어, 당시 신군부는 당시 상황을 대단히 엄중하게 판단하고 있었고 중앙정보부는 사태의 추이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노동자 측은 악행을 일삼는 동원탄좌 사측과 함께 그들의 푸들이자 현장의 압제적인 권력자였던 어용노조를 강하게 공격했다.   양측의 충돌은 날카롭게 대치하고 맞붙으며 끝났으나, 그 여진은 길게 길게 광부들에게 짙은 주홍글씨를 남겼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의 권양기와 산 위의 강원랜드.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장치인 권양기의 존재는 수직갱도의 존재를 의미한다.  도로 오른쪽이 동원탄좌 본사 건물과 노조 사무실.



     강원도 정선군의 정선읍이 순박한 시골 할머니라면, 같은 정선군의 사북읍은 섹시하고 화려하지만  약간은 촌스러운 레이디 가가라 할 수 있다.   사북에 가면 빨강 파랑 분홍빛으로 화려하지만 그 빛깔 바로 아래에는 시커먼 검정이 짙게 깔려 있다.   강원랜드 카지노와 하이원 스키장, 사북읍내는 언제나 흥청대지만, 그 아래 지장천은 비만 오면 아직도 석탄 빛깔을 짙게 드러낸다. 


     한 때 사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성했던 탄광촌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거대 탄광에 기대고 또 그 거대탄광에 상처받고 누군가는 갱 속에서 생명을 잃었던 곳이다.   지금의 카지노와 골프장, 스키장은 광부들의 잃어버린 일터, 사양화되어 망해버린 사업장 위에 세워졌다.   







동원탄좌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의 흔적들은 꽤 오래전부터 세월에 깎이고 나무들로 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북교차로에 서서 안경다리 위를 올려다보면 산 위에 건물 몇 개가 빼꼼히 보일 뿐 평범한 산으로 보일 뿐이다.    여러 산등성이를 빼곡히 채웠던 갱구들과 채탄시설들, 사택촌들은 스러져 숲과 풀밭이 되었다.    산 위에 카지노와 스키장이 간신히 보일 뿐이다.    안경다리를 건너 거대한 권양기를 마주하게 되면 사북탄광의 진면목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태백선 철로 아래 안경다리(쌍굴다리)부터 백운산(1426m) 꼭대기 무렵까지는 몽땅 동원탄좌의 땅이었다.   백운산 정상 언저리까지 갱구들과 사택촌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스키장(하이원리조트)의 산 정상 쪽 경계까지가 모두 탄광촌이었다. 


     1959년 79 가구였던 사북은 1980년 인구 5만 명을 넘어섰다.   1973년에는 "사북읍"으로 승격되었다.    1960-1970년대 석탄산업 전성기에 민영탄광의 메카는 사북이었다.   동원탄좌 직영탄광 만의 광부 수가 많을 때는 4,500명을 넘었다.  


     해발 900m 정도까지는 동원탄좌의 직영 갱구와 사택촌이 자리 잡았다.   대략 강원랜드보다 조금 더 산 쪽의 레벨까지이다.    그로부터 백운산 정상 무렵까지는 동원탄좌에서 하청 받은 업체들의 시설들과 사택촌이 자리 잡았다.    현재의 강원랜드 포함하여 그 위로의 스키장까지 몽땅 사북광업소였던 거다.   엄청난 규모다.


산등성이 위로 펼쳐진 동원탄좌의 사택촌


     사북의 동원탄좌는 1978년 무렵부터는 전국 석탄 생산량 1위 탄광이 되었다.   태백 삼척 정선 영월로 이어지는 강원 남부 탄전지대의 핵심 탄광이었다.    1980년 4월 노동쟁의로 이 탄광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거대한 권양기 뒤편에 "650 갱"이 자리 잡고 있다.   위의 지도에서의 "작업현장"이 "650 갱"이다. "650 갱"은 해발 650m에 입구를 가진 갱을 말한다.    1965년 12월 개통되었는데, 점차 연장되어 고한역 남쪽 박심리까지 7.3Km에 달했다.    대형갱도여서 지하막장까지 8인승 인차(63cm 철로 위의 이동수단)로 1시간이나 소요되었다.    650 갱은 동원탄좌의 대표 갱으로, 폐광 이후 650 갱을 추억하는 장소로 사북시장 부근에 650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이외에 동원탄좌의 직영 갱으로 710 갱, 820 갱, 875 갱, 970 갱 등이 산 위로 이어졌다. 


650 갱 :  2023년 3월


     동원탄좌(주)의 본사 사무실은 안경다리 넘어 오른편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리과 총무과 노조사무실 등으로 빼곡했던 언덕 위 건물들은 다 허물어지고 풀밭으로만 남아있다.    사북 쟁의의 트리거였던 사복경찰 탈출 사건 또한 이 언덕배기에서 이루어졌다.    회사 고위층과 사업 파트너들만 이용했던 객실 역시 이 언덕에 있었다.    사북 쟁의에서 객실은 광부들에 의해 사북 지서보다 먼저 파괴되었다. 


동원탄좌 본사 건물이 있던 자리 :  2023년 3월


     현재의 "뿌리관"은 원래는 동원탄좌 근로자 복지회관이었다.    사북 쟁의 이후 회사의 유화책에 의해 지어졌는데, 내부에 목욕탕, 새마을 구판장, 이발소, 당구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권양기 부근의 뿌리관


     쫄딱 구덩이로 불리던 덕대 사업장(동원탄좌로부터 하청 받은 탄광)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덕대 사업장 인근의 사택촌은 사택이라 불리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런저런 재료로 땜질하여 지은 이름 그대로의 판자촌이었다.    사택촌의 중심부에 있던 화절령 구판장은 해발 1100m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보다 더 산 위로 "1177 갱"이 있었다.


     갱도 주변 판잣집에 광부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화장실은 공중화장실이었고, 탄 캐고 나온 후에는 제한 급수로 인해 제대로 몸을 씻을 물도 없었다.    30-40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함께 사용했다. 




공동 화장실


      1980년 사북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비인간적 처우의 개선과 어용노조 심판, 그리고 임금인상이었다.   


      암행독찰조는 동원탄좌 회장의 고향(익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광부들의 불평불만을 감시하고 사택촌까지 사찰하면서 감봉과 해고 등의 징계권을 휘둘렀다.   구판장 역시 회장의 친인척들로 구성되어 쉽게 산을 내려올 수 없는 광부 가족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10년 이상 기득권을 누리던 어용노조 또한 사측과 한배를 탔다. 


     당시 동원탄좌 광부의 임금 수준은 초등학교 교사의 2-3배 수준이었으나, 사측의 비인간적 처우와 어용 노조 문제가 쟁의의 핵심 원인이었다.    갱 붕괴 사고와 진폐증의 위험 위에, 강요된 인간적 모멸감이 컸다.  


진폐증 환자


사북 사태  :   1980.4.21 - 4.24


사북 사태 (1980.4.21 - 4.24) :  [조선일보] "광부 3천5백 명 유혈 난동,  경찰 1명 사망,  린치 당하는 노조지부장 부인"


     안경다리에서의 투석전으로 경찰관 1명이 사망했고, 경찰 측과 노동자 측에서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인근 영월에는 사태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대기 중이었다.    당시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 계엄령 하에 있었다.    사태는 4일 만에 합의 타결되었고, 노동자 측 지도부에게도 형사처벌 면제가 약속되었다.    그러나, 4/24 협상 타결 다음 날부터 경찰은 주모자 색출에 들어갔다.    계엄사령부의 사북사태 합동수사부는 관련자 110명을 연행하였는데 이 중 28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조사 중 가해진 악랄했던 고문 사실은 훗날 드러났다.    당시 광부의 지도자였던 이원갑은 훗날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원갑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막장은 더욱 깊어져 가야 했고, 탄광의 채산성은 점점 떨어져 갔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탄광들은 속속 폐광에 들어갔다.    탄전지대의 무너지는 지역 경제를 붙들기 위한 여러 지역 정책이 시행되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탄광 사택이었던 사북 동원탄좌 지장산 사택촌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2000년 강원랜드가 들어섰다. 




강원랜드는 해발 800m 높이에 있다. 왼쪽의 지장산(927m) 꼭대기 무렵까지 갱구와 사택촌이 자리했다.

      안경다리는 동원탄좌 땅의 경계였고, 대립했던 양측의 바리케이드였다.   그 현장에서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사북성당 옆의 사북파출소는 당시 시위대의 투석으로 완전히 망가졌었다.  그래도 당시의 파출소 앞 제일의원은 여전히 제일의원으로 남아있고, 사북시장은 사북시장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와 달라진 점도 많다.   사북역 앞에는 강원랜드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다니고, 콤프(강원랜드의 마일리지)를 취급하는 상점들도 여럿 보인다.   한 집 건너 보이는 전당포와 마사지 가게 역시 진풍경이다.   


왼쪽의 안경다리


     동원탄좌 회장 이연(1915-2003)은 대한석탄협회장을 지낸 광업계 거물이었다.   그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전주 신흥학교를 나와 1933년부터 전북도청에서 토목기사로 일했다.   한국전쟁 무렵부터 건설회사 "창설사"를 운영했다.   1955년 이후 태백지역의 중소 탄광 개발 붐 속에 1962년 정선 사북 땅에 원동탄좌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듬해 사명을 동원탄좌개발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사북은 질 좋은 석탄의 보고였다.   1978년 전국 탄광 중 석탄생산량 1위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이 되었다.  사북 노동쟁의는 동원탄좌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사북사태 이후 이연 회장은 석탄산업에서 관광레저산업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리츠 칼튼 서울호텔 등 여러 호텔과 골프장을 운영하였다. 


     1980년 후반부터 들이닥친 석탄산업 사양화 흐름으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역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95년 국내 No.1 민영탄광의 지위도 도계의 경동상덕광업소에 내주게 된다.  1990년 증시에 상장하고 1992년 사명을 (주)동원으로 바꾸고 바다모래 사업에 진출하는 등 재기를 도모했다.  2004년 사북의 동원탄좌는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지장산 사택촌은 먼저 헐리고 그 자리에 2000년 강원랜드가 들어섰다. 


     이연 창업주의 큰 아들 이혁배 회장은 (주)동원 회장으로서 바다모래 사업으로 활로를 찾았는데, 2016년 결국 회사를 사모펀드에 회사를 매각하였다.   그 후신의 현재 사명은 HLB글로벌이다.   HLB글로벌은 등록된 본사 주소로 "정선군 사북읍 동탄길 38-13(사북리)"를 가지고 있고, 현재 코스피 상장기업이다.


      호텔 사업을 맡은 둘째 아들은 "전원산업"을 세웠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호텔과 골프장이 사업상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 해 전 "그룹 빅뱅 멤버 승리" 관련하여 구설수에 오른 바도 있다.



1980년 4월 21일,  사측과 어용노조를 끼고들며 사찰을 일삼던 경찰에 대한 보복으로, 광부들은 사북지서를 투석으로 부쉈다.  말끔하게 새로 지은 파출소는 옛 기억을 잊은 듯.




사북지서를 부순 후 광부들이 집결했던 시위 현장 옆의 제일의원.  건물도 이름도 그 때 그대로이다.



사북시장 :  콤프(강원랜드의 마일리지)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가게가 많다.


지장천, 전당사, 마사지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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