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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섭 Nov 15. 2018

#1. 여행이 즐거워지는 숙소의 재발견

여행이 즐거워지는 숙소의 재발견

“그렇게 방에 가만히 있을거면 뭐하러 여행 왔냐!”


좀 쉬엄쉬엄 다니면 안되냐는 여자친구의 귓전에 날아와 꽂힌 남자친구의 외침.

분단위로 스케줄이 빡빡하게 쓰여진 일정표를 그녀의 코앞에 들이밀고는 버럭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씨발...이게 여행이냐 극기훈련이냐’


여자친구의 입에서 욕이 새어나왔다.

물론 나의 일화는 아니고, 예능 프로그램 <연애의 발견>에 소개된 사연에서 발췌한 대화다. (여자친구의 속마음은 그녀에게 빙의한 나의 상상)


여행을 해병대 캠프쯤의 강도로 빡세게 돌리는 강박적인 유형들이 있다. 그놈의 본전 탓일까. 물론 몸과 마음이 활고등어마냥 팔팔한 20대라면 무리가 되지 않겠지만, 30대를 넘어선 (즉, 더 이상 청춘이 아닌) 평범한 여행자에게는 여행이 아니라 노동이 될지 모른다. 특히나 과중한 업무의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짬내서 온 지친 직장인 여행자라면 더더욱.


나도 한때 가진 건 체력밖에 없는 20대 여행자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정반대의 지점에 와있다. 나이가 들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여행을 대하는 태도나 시각도 많이 변했다. 여행을 즐기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여행은 문밖에만 있지 않아


처음 27살에 유럽배낭여행을 갔을 때, 숙소를 선택하는 절대 기준은 ‘얼마나 싼가’였다. 여행은 ‘문밖’에 있는 것이었고, 숙소는 오직 ‘잠만’ 자는 곳이었으므로. 관광지에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면, 비 안새고 두 다리 뻗고 잘 침대 한 칸만 허락되면 그걸로 족했다. 로마에서 묵었던 도미토리는 한방에 열두명이나 재우는 열악한 곳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고 불편한게 한 트럭이었지만 노 플라블럼. 괜찮았다. 어차피 나에게 여행은 문밖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가장 많이 관점이 변한 건, 숙소에 대한 가치다. 이제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 아닌, ‘잠도’ 자는 곳이 되었다. 익숙한 내방이 아닌 전혀 다른 천장, 전혀 다른 낯선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 자체로 근사한 여행이 된 것이다. (몸이 늙고 피곤하니 일찍 일어나 바깥으로 나도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다. 쉬어도 쉬어도 또 쉬고 싶은 게 직장인)



숙소를 여행하는 즐거움


특히, 숙소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여행지의 이미지가 됐다. 빽빽한 고층건물로 둘러싸인 풍경인지, 산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인지, 열대우림으로 가득한 풍경인지가 그 도시의 인상을 결정지었다. 이러니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사실 이건 숙소가 싸고 비싸고의 문제가 아니다. 숙소에 대한 관점의 변화일뿐.


여행지에서 뭐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먹어봐야 한다는 강박이 뒤집혔다. 여행의 목적이 낯섦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숙소야말로 낯섦을 탐험하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내 현실 방 속의 침대보다 몇배나 비싸고  튼튼한 매트리스에서 알람없이 숙면을 취하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챙겨 온 책을 읽고, 창밖으로 해가 도시를 깨우고 노을이 물드는 풍경을 감상하고, 이 도시의 방송은 또 어떤 스타일인지 TV도 시청하고, 시장에서 사온 그 도시의 주전부리도 먹고, 책상에 앉아 그날의 감상을 정리하는 일. 오직 숙소에서만 할 수 있는 여행이 무궁무진했다.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가득했다.


무조건 밖으로 밖으로. 여유없으 무리하게 동선을 소화한다고 도시의 매력을 더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생각을 조금만 달라해보자. 나의 숙소에 애정을 가지고 다테일하게 바라보면, 몰라봤던 매력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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