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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섭 Nov 21. 2018

#3. 3박4일의 완벽한 홋카이도

3박4일의 완벽한 홋카이도 (feat.  삿포로 눈싸대기) - 1편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없는 것 한 가지. 여름휴가! 일반 직장인들은 여름휴가시즌이라는 게 있으니 길게든 짧게든 시기에 대한 ‘계획’ 이란 걸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여름휴가철이라고 방송이 쉬어가는 게 아니니, 나에겐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얘기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언제나 급하게, 후다닥 떠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게 예정된 방송이 급하게 죽었을 때다. 긴박한 뉴스로 속보가 끼어들어 왔다거나, 메이저리그 경기가 급하게 편성에 잡혔거나 하면, 보통 방송이 죽는다. 한주 미뤄지는 그 틈에 나는 짐가방을 싸서 공항으로 냅다 튄다. 나의 여행은 대게 이런 식으로 진행돼 왔다.


산치토세 공항 도착직전 눈으로 덮인 삿포로

2월 삿포로 눈축제가 끝난 바로 다음날, 3박 4일간의 급 여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눈물범벅 캐리어 키 분실사건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날, 눈발에 양 따귀를 맞아가며 숙소부터 찾았다. 어찌나 눈 따귀를 대차게 맞았는지 호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정신이 반쯤은 가출한 상태였다. 온기가 있는 방안에 들어서자 팔다리가 노곤 노곤해지면서 긴장이 풀렸다. 일단 대충 가벼운 짐만 챙겨서 동네 산책에 나섰다. 5-6년 만에 다시 찾은 삿포로는 달라진 게 없었다. 하나 있다면 그때는 삿포로 맥주축제가 열린 한여름, 지금은 삿포로 눈축제 다음날인 한겨울이라는 점뿐. 그래도 오랜만이라 동네 구석구석을 걸으며 삿포로 인들의 소울푸드인 스프카레도 줄 서서 먹고, 돈키호테 가서 잡화 쇼핑도 하고, 쌓인 눈도 실컷 밟아보다가 해 떨어질 무렵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편히 좀 누워볼까 싶었는데, 사달이 났다.

삿포로의 소울푸드 스프카레, 이때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캐리어 열쇠 분실 사건이 벌어진 거다. 캐리어 안에 환전한 돈이며, 옷이며 모든 게 다 들어있는데, 정신없이 밖에서 돌아다니다 키를 잃어버린 거다. 혹시나 하고 침대 밑까지 들쑤셔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캬. 여행 첫날부터 이게 뭔 난 벼락인지. 이번 여행은 망했구나 싶은 절망감을 부여잡고, 곧장 호텔 밖으로 나가 돌아다녔던 동선 그대로 다시 순회를 했다. 점원들한테 혹시 이렇게 생긴 캐리어 키 못 봤냐고 묻고, 호텔 연락처 알려주며 찾게 되면 꼭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모든 동선을 다 훑었지만 결국 열쇠는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엔 찾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이 있었는데, 결국 빈손으로 호텔방으로 돌아오게 됐다. 눈물이 핑 돌면서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던 차 무심결에 책상 서랍을 열었는데.... 심봤다!!!!! 서랍 안에 열쇠가 빼꼼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삿포로 타워가 보이는 호텔방 창밖 풍경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바깥 눈보라에 쌍 싸대기 맞으며 정신 못 차렸던 내가 따뜻한 방 안에서 정신이 살짝 혼미했던 때, 무의식적으로 캐리어 키를 서랍 안에 안전하게 모셔뒀던 거다.


사람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다. 10분 전만 해도 여행을 망쳤네 어쨌네 하며 울고 불며 자책하던 내가, 키를 찾은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 다시 편안한 여행자의 마음이 되어 여행을 재개했다.


삿포로 교자와 클래식 맥주

겨울에 삿포로를 찾게 되는 이유 하나. 맛있는 교자와 삿포로 클래식 맥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묵는 호텔 골목에 있는 교자 집은 평생 단골집으로 삼고 싶은 곳이다. 좁고 좁은 바(bar)에 퇴근길 손님들이 옹기종기 앉아 교자 한 접시에 맥주 한잔씩을 마시며 하루의 피곤을 풀고 마무리할 수 있는 곳. 나 역시 삿포로 직장인들 틈에 껴서 마치 여기 주민인 양 한 자리 차지하고 앉는다. 한 접시에 3-4개쯤 나오는 새끼손가락만 한 교자. 그래서 종류별로 이것저것 차례로 시키는 맛이 있다. 여기에 삿포로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삿포로 클래식 맥주를 시킨다. 200ml도 안돼 보이는 작은 유리잔에 꽉 채워 교자와 함께 먹으면, 그날의 피로가 한방에 풀린다. 열쇠를 분실한 줄 알고 온몸이 긴장했던 하루가 교자와 맥주 한잔에 다 사라졌다.


교자 한접시에 삿포로클래식 맥주 한잔의 꿀조합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첫날밤이다.


'아... 이 맛에 삿포로 온다니까'


겨울왕국? 숲 뷰의 노천온천


다음날 아침, 조식도 거르고 삿포로역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한겨울에 삿포로에 온 이유, 끝내주는 노천탕이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을 달리면 온 사방이 눈으로 덮인 숲 속 마을이 열린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눈의 왕국인가 싶을 때쯤, 종점이라며 내리라고 알려주는 기사 아저씨. 여기는 바로 호혜이쿄다.


삿포로 시내는 눈이 그쳐도 호혜이쿄는 24시간 눈이 그 치치 않는 것 같다. 불과 1시간 거리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다. 산으로 병풍 쳐진 풍경에 머리 위로 솜털 같은 눈이 계속 떨어진다. 하지만, 구경도 잠시! 얼른 옷 갈아 입고 노천탕으로 직행했다. 뭔가 허름해 보이고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잘 못 온건가 싶었지만 역시 나의 착각!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노천탕을 마주하는 순간, 여기는 지상낙원이었다.

호혜이쿄에서 온천 후 아이스크림은 필수
한강뷰 부럽지 않은 호혜이쿄의 숲뷰
탕에서 나오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세상 쿨한 맥주


온 사방이 뻥 뚫려있는 숲 뷰,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완벽하게 깨끗한 눈 쌓인 숲 뷰가 나를 맞이했다. 딱 알맞은 온도의 노천탕에 몸을 반쯤 담갔다. 바깥에서는 겨울 패딩에 털장갑을 껴도 추웠는데, 여기는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전혀 춥지가 않았다. '이것이 노천탕의 매력인 건가.' 물밖에 나온 얼굴에 눈이 떨어져 쌓여도 차가운 느낌보다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있고 싶은 곳. 나만 알고 싶은 곳. 남들은  최대한 늦게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곳.


한 겨울 삿포로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하루,  

완벽한 둘째 날 아침은 이렇게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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