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 줄리가 말했다. “한국의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실시간 녹화 비디오를 유튜브나 어떤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나요? 한국에 가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괴로우면 그런 거라도 보는 게 어때요? 익숙한 풍경과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몰라요.”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당장 그런 건 전혀 도움되지 않아요! 그냥 환영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내가 원하는 건 엄마를 끌어안는 것, 동생 가족과 실없는 농담을 하고 웃거나 같은 공간 안에서 변하는 공기의 흐름과 서로의 냄새를 맡는 거예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줄리에게 이렇게 대꾸할 순 없었다. 그녀에겐 할 말이 없을 테고 나도 곧 후회할 테니까. 대신 나는 시간을 조금 두고 그렇게 해보죠라고 말했다.
작년에 코로나가 터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국을 갈 수 있었다면 나의 우울증과 향수병이 이렇게 방치되진 않았을 것이다. 지구 상 모든 이의 삶을 코로나가 휩쓸었듯, 나도 한국을 방문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해야만 했다. 상황이 나아지길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호주의 코로나 대응 방법은 한국과 노선이 아주 달랐다. 도시에서 10명이 채 되지 않는 확진자가 나와도 도시 전체를 록다운 해 버렸고, 주와 주 사이에는 이동 제한이 내려졌다. 외국인의 입국을 아예 금지했고, 심지어 자국민의 출국이나 입국도 철저하게 제한했다.
나는 영주권을 신청한 상태였고, 아직 자국민으로 대우를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출국이 가능했지만, 언제 호주로 다시 들어올 수 있을지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했기에, 한국으로 출국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2020년을 뒤돌아보면, 한국에 쉽게 갈 수 없다는 현실 자각과 함께 코로나가 만든 이 낯선 세상 속에서 나는 나를 서서히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어갔던 것 같다. 일상의 평범한 리듬과 미래를 향한 막연한 믿음이 깨어지자, 하루의 평안과 방향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나는 실패자라는 생각,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힘센 덩굴처럼, 점점 나를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해가 바뀌자 극단적이기까지 했던 정부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건지, 코로나 확진을 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정부는 내수를 살리기 위해 국내 여행을 권장하고 무료 여행 바우처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화색을 띠며 변한 분위기를 반가워할 때 나는 그들과는 아무 상관 없이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본국에 가족을 두고 온 많은 이민자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것. 그건 얼마나 큰 자유이고 특권인지.
줄리와 상담을 진행하며 결국 깨달은 건 나에겐 한계가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내 우울증과 향수병이 더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내가 한국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도 내 결정에 동의했고 1년 가까이 호주에 들어오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이 나를 이끌었다. 그리움을 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다만 내가 성인이 되어 이루고 선택한 가족을 호주에 두고 한국으로 가려고 하니, 다시 내가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