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없는 생각들
미술에 몰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 나이 대여섯 살 정도였다. 시간 가는지 모르고 크레파스로 하얀 종이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고 때 묻은 손으로 이 모양 저 모양 종이를 접어 볼 때였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미술 세계는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미술가, 관람객, 전시자, 컬렉터로 이루어진 그 세계는 들여다볼수록 기묘하다.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유와 감화에 있을 텐데, 작품이 높은 미술적인 성과를 이룰수록 가격이 더해지고 작품은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폐쇄적으로 관리된다. 아이러니다.
어린 나는 그리는 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뒤돌아 생각해보면 예민하고 내향적인 성격에 그림은 좋은 도피처였을 수도 있다. 형태와 색이 이차원으로 구현되는 걸 보고 어린 가슴에 전율이 흘렀을 수도 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림은 그들과 나를 구별해 주는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모든 과목에서 보통을 뛰어넘지 못했지만, 미술 시간엔 좀 달랐다. 자주 선생님 눈에 띄는 학생이었고 내 그림은 교실 뒤편 학급 게시판에 곧잘 붙여지곤 했다. 나에게 우월감을 가르쳐준 선생님은 사람이 아닌 미술 그 자체였다. 이 또한 나에겐 아이러니다.
지금에서야 어릴 때부터 자리 잡았던 우월감을 내면의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과거 꽤 오랜 기간 그 우월감을 나 자신과 같이 소중히 여겼었다.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지도하다보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전 못 그려요.’ 일거다.
아이는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미술은 나에게 승리와 자기애를 안겨준 대신에 어떤 아이들에겐 패배감과 무기력을 맛보게 했다. 안타깝게도 미술 하면 떠오르는 이 감정은 그들 평생을 지배할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나는 주로 수학, 회계, 차트를 볼 때 공포와 마비를 경험하는데, 조그만 아이들이 미술을 하며 비슷한 걸 느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하다. 숫자라는 절대적인 수치 앞에선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막혀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미술엔 답이 없다. 아이가 그은 선 하나에 감정과 지금 성장하고 있는 근육의 움직임이 담겨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어째서 자신을 비판하게 되었을까. 왜 어른들은 그들을 변호해 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