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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Sep 12. 2023

이혼의 기쁨과 슬픔

자아의 미로

호주에서 이혼을 하려면 1년의 별거 기간을 채워야 한다.

멜번에서 별거기간을 채우는 시간 동안 어쩌다 다른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해야 될 때, 나는 스스럼없이 말을 한다. 서로 이혼을 결정하고 나는 멜번에서 따로 혼자 살고 있다고. 이 이야기를 하면 남자와 여자의 반응은 조금 갈리는데, 상대가 남자인 경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마치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처럼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Sorry라고 말해준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이성이면 또 다른 반응이지만) 이럴 때 나를 거들어 주는 건 다른 여성들이다. '왜? 이혼은 괜찮은 거야.' 그러면 나도 힘을 얻고 말을 이어간다. 이혼 결정을 내린 후에 사실 나는 훨씬 더 행복하다고.

나에게 이혼은 시련을 극복했다는 성취감으로 연결되기에,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당당했다. 또는 호주 사회가 한국에 비해 이혼을 덜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결혼 생활의 막바지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결혼 생활의 마지막 해 2021년 4월의 봄을 한국에서 맞이했는데, 우울했던 나는 나뭇가지 끝에서 새로 돋아나는 연녹색  이파리가 유독 처연하게 느껴졌다. 나무는 겨울 동안 몸을 움츠리고 죽음에 가까운 잠을 자다가 결국 기울어진 시간과 온도에 굴북해서 다시 생산의 계절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 여린 잎이 나무의 삶을 단단하게 동여매 주면서도 동시에 옥죄는 초록색 사슬 같아 보였다. 이어지는 삶과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그런 모습으로 밖에는 투영할 길이 없었다.

이후 다시 호주로 돌아와 남편과 재회하고 일어났던 몇 개의 사건들을 통해, 그와 내가 가족으로서 함께 지내는 것과 결혼 생활 속 나의 바람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명확하게 깨닫는 순간, 그토록 보이지 않던 미로의 출구가 눈앞에 나타난듯했다. 시간이 채워진 것일까.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었고,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행위에서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이혼은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도 찾아온다. 결혼을 하면서 그 누구도 '이혼을 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결혼을 할 때는 그 마음이 진실했기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가족들 앞에서 서약을 하고 또 그 진실함이 영원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서로를 묶어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혼 후 내가 가장 애도해야 했던 건, 이혼으로 인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온전한 가정을 이루리라는 젊은 날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실패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이혼 서류를 준비하며, 10년 전, 미래를 향한 불안했던  마음을 추스르며 떨리는 마음으로 했던 서로의 서약 기억 속으로 떠올랐다. 지금은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면서, 내 안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에 대한 내 결정이 철저히 틀렸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나오면서 속으로 한 사람을 끝없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상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 결혼 서약을 한 것도 나, 그것을 깨버린 것도 나, 그래서 미움의 대상이 된 나, 그리고 이것마저도 극복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

자기혐오라는 또 다른 미로 속에 던져진 것 같다. 나를 다시 좋아하고 아끼게 되는 건 어떤 것일까.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미로의 출구 근처에는 나를 인도하는 작은 별이 떠있는 느낌이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출구에 와있을 것이다. 자세한 길은 몰라도 출구의 방향을 향해 가다 보면 길을 잃는 일도 있겠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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