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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켄’이라고 불렸다.
백산 구출작전을 수행한 현준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뒤로 줄곳 머물고 있는 아키타현 오가반도에 위치한 작은 료칸으로 돌아갔다. 료칸 식구들인 코사쿠, 시오리, 아야.. 그리고 리에가 현준을 반겨줬다. 아홉 살인 아야는 현준을 잘 따랐다. 버릇없이 굴 때면 고모인 리에가 나무랐지만 현준은 괜찮다고 아야의 짓궂음까지 받아 주었다. 현준이 유일하게 웃음을 보이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리에는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와 부모님들을 도우며 료칸의 살림을 맡고 있었다. 현준이 암흑같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본 얼굴이 리에 였다. 현준은 리에를 처음 본 그 날을 떠올렸다.
리에는 당황하는 현준을 ‘켄’이라고 불렀다.
“내 이름이 켄 인가?”현준은 능숙한 일본어로 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입밖으로 나온 일본어와는 다르게 머릿속으론 한국어를 통해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한국인인가?’
리에는 료칸에 현준을 맡기고 간 사내들에 대해 말해줬다. 현준이 머리를 다쳤고 몸을 추스릴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내들은 1년치 숙박료와 현준을 돌보는데 필요한 비용을 선지급 하고 사라졌다. 현준은 그 사내들에 대해 물었지만 남자들 중 하나의 이름이 ‘레이’라는 것과 현준을 ‘켄’이라고 부르는 것 외에 아는게 없었다.
“켄...”
현준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려보지만 낯선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혹시 기억나는 게 좀 있어요?”
리에의 목소리에 현준은 현실로 돌아왔다. 현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리에의 보살핌으로 몸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6개월이 걸렸고 거의 1년이 되던 날.. 레이라는 사내가 현준을 찾아왔다. 레이는 현준이 자신의 동료였다고 알려줬다. 현준과 자신이 속한 회사의 이름을 ‘아이리스’ 라고 불렀다.
아이리스.. 그 단어에 현준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아이리스 였을까?
평상시의 현준은 료칸에 머물며 리에를 도왔다. 그러다 현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레이로부터 연락이 왔고 현준을 데리러 사람들 이 왔다. 백산을 구출하는 작전은 현준이 아이리스로부터 받은 세 번째 일이었다.
첫 번째 일은 일본 유력 일간지의 한 기자를 자살로 위장, 살해하는 일이었다. 현준은 첫 번째 일을 전달받고 당황했다. 살인? 내가 하던 일이 그런 일이었나? 하지만 레이에게 설득 돼 첫 번째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는 본인이 뛰어난 암살자로 오랜 기간 훈련 받았다는 걸 느낄수 있었다.
두 번째 일은 일본 전직관료 부부를 살해하는 일이었다. 현준은 그 일 역시 능숙하 게 처리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현준은 매우 잘 훈련된‘암살자’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현준을 위해 료칸 식구들은 작은 파티를 마련한다. 현준은 말수가 없는 료칸의 주인 코사쿠가 권하는 사케를 꽤 많이 마셨다.
그날 밤.. 현준은 평소와는 다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새벽... 현준의 방으로 그림자 몇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들은 현준이 내일 정오까 진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하곤 현준의 상의를 벗겼다. 그들은 현준의 머리, 가슴, 손목 등에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전기장치들을 부착했 다. 현준의 뇌파와 체크하는 장비가 연결되고.. 한 시간 정도 저장된 현준의 뇌파 등 신체기록이 어딘가로 전송됐다. 아침이 오기 전 그들은 현준의 방을 원래대로 돌려놓곤 사라졌다.
의문의 사람들로부터 현준의 상태를 전해들은 코사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평소대로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던지곤 전화를 끊었다.
“김현준의 기억이 돌아올 확률은 제로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NSS 에 들어간 이후로도 준호는 일주일에 한번 대학원 강의를 들었다. 물론, 강의보단 승희와 시선을 맞추는데 더 신경을 썼다. 학교를 벗어나는 승희를 쫓아간 준호는 술 한 잔만 같이 마시면 더는 귀찮게 안하 겠다고 조른다. 승희는 할 수 없이 준호와 술자리를 갖는다.
말없이 술을 마시는 승희, 반면에 준호는 쉴새없이 뭔가를 떠들어 댔다. 승희의 귀엔 준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왜 여기로 온거야. 최승희.’
승희는 신중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승희는 주변을 둘러봤다. 메뉴판의 가격도 올랐고 가게 분위기도 예전과는 달랐지 만 이곳은 현준과 처음 술자리를 했던 그곳이었다.
‘단지 술자리인데 뭐..’
승희는 준호가 섞고 있던 술잔을 빼앗아 자기 스타일대로 폭탄주를 제조했다. 잠깐 놀란 표정의 준호였지만 이내 미소로 변했다.
“이제 좀 나랑 상대할 결심이 섰어요?”
준호는 첫잔을 단숨에 비우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너 같은 애송인 현준씨 한테 안돼.’ 승희는 밑도 끝도 없이 까부는 준호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등 뒤의 메뉴판.. 한번 보고 순서와 가격을 외우면.. 다음에도 술 마셔줄게.”
준호는 승희의 제안에 반색을 띄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곤 한번 돌아 볼 것도 없이 메뉴판의 순서를 외웠고 승희가 부르는 메뉴의 가격을 정확히 맞췄다. 준호가 바라보는 승희의 뒤쪽으로 거울이 달려있다는 것을 승희는 몰랐다.
집으로 향하는 준호는 상현에게 전화를 건다. 승희와의 사적인 만남에 대해 얘기하 곤 조만간 NSS 로 복귀시키겠다고 떵떵 큰소리친다. 그리곤 승희가 혼잣말처럼 했던 ‘너 같은 애송인 현준씨한테 안돼.’ 의 주인공 ‘현준’ 에 대해 묻는다.
상현은 말을 아낀다. NSS 안에서 현준의 얘기를 꺼내는 건 금기시 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한 준호는 양정인 실장과 오현규 과학수사실장 등을 닦달해 현 준에 대한 자료를 얻는다. 며칠 동안 거의 잠도 안자고 현준에 대한 자료를 검토한 준호는 상현을 찾아간다. 그리고 특유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단언한다.
“김현준 선배... 반드시 살아있어요. 제가 찾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