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협상

1

by 꼬불이

새벽 4시 27분, 휴대폰의 진동이 김현성을 깨웠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찾은 휴대폰 화면에는 '워싱턴 - 박민철'이라는 이름이 깜빡이고 있었다. 민철은 미국 국무부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였다. 이런 시간에 전화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현성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현성아, 미안. 깨웠지? 하지만 이건 정말 급해."


민철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가 없었다. 뭔가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 몇 시인 줄 알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아무에게도 하지 마. 절대로."


현성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아내 수진이 몸을 뒤척였지만 깨지 않았다.


"뭔데?"

"두 시간 후에 미국 대통령이 긴급 발표를 할 예정이야. 소행성 충돌 관련해서."


현성의 뇌가 순간적으로 명료해졌다. '소행성?'


"네메시스라고 불리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 예정이야. 4개월 후.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해."


전화기 너머로 민철의 숨소리가 들렸다. 현성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성아, 거기 있어?"

"있어... 잠깐만... 이게 무슨..." 현성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도 한 시간 전에 들었어. 국무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고 보면 돼. 한국 정부는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현성은 거실로 나가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4시 28분. 백악관 발표까지 1시간 32분.


"확실한 거야?"

"NASA에서 몇 주 전부터 추적했대. 지름 15킬로미터.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보다 큰 규모야."


현성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파에 주저앉으며 이마를 쥐어잡았다.


"왜 지금까지 비밀로..."

"발견이 늦었어. 네메시스는 태양 방향에서 접근했거든. 그쪽은 망원경으로 관측하기 어려워. 태양 눈부심 때문에 완벽한 사각지대였다고." 민철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게다가 이 소행성은 알베도가 극도로 낮아. 빛 반사율이 2% 미만이라서 우주의 검은 배경과 거의 구별이 안 됐대. 마치 스텔스 소행성 같았던 거야."


현성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으로서 17년간 쌓아온 경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서는 감정보다 절차가 우선이었다.


"민철아, 고마워. 정말."

"조심해, 현성아. 앞으로 몇 개월... 아니, 몇 시간이 지나면 지옥이 시작 될 거야."




통화를 끊고 현성은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세상이 끝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침실로 들어가자 수진이 눈을 뜨고 있었다.


"누구 전화야? 이런 시간에..."


현성은 아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결혼 12년째,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 그리고 옆방에서 자고 있는 9살 딸 서연. 4개월 후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회사 일이야. 급한 일이 생겼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고, 공식 발표 전에 가족을 불안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또? 요즘 너무 바쁘잖아..." 수진의 목소리에는 익숙한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미안해. 조금만 더 자. 아침 일찍 나가야 해."



현성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정장, 넥타이, 시계. 일상적인 동작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치 마지막으로 입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차를 몰며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씨발..." 평소에 욕을 하지 않는 현성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한강을 지나며 현성은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의 서울은 조용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시. 곧 이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800만 명의 사람들.


현성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국민들에게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할까? 군사적 대비는? 경제적 충격은? 사회적 혼란은?


문제는 시간이었다. 1시간 30분 후면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에 발표한다. 그 순간 한국도 똑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청와대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5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악관 발표까지 1시간 10분.


현성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비서실장이었다.


"현성씨, 무슨 일이세요? 새벽에 전화를 왜 그렇게..."

"실장님, 급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청와대에 계세요?"

"아니요, 집에서 막 나서는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해요?"

현성은 시계를 확인했다. "1시간 5분 후에 백악관에서 긴급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무슨?"

"소행성 충돌이 예상된다고 합니다. 약 4개월 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확실한 정보인가요?"

"워싱턴의 국무부 소식통에서 들었습니다. 신뢰할 만한 정보입니다."

"젠장..."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당장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는데... 현성씨, 상황실로 와요. 빨리."



카운트다운 1:00


청와대 상황실에는 이미 몇 명의 핵심 참모들이 모여 있었다. 비서실장, 국가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이 긴급히 소집된 상태였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다시 말해보세요." 비서실장이 현성을 바라봤다.


현성은 민철로부터 들은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했다. 네메시스라는 코드명의 소행성, 지름 15킬로미터, 4개월 후 충돌 예정, 모든 대응책 실패.


외교부 장관이 말했다. "미 대사관에 연락해봤는데 확실한 답변을 못 받고 있습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나타났다. "NASA에 직접 연락해봤지만 아직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 관측 데이터를 확인해보니..." 그가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상한 물체가 감지되고 있긴 합니다. 3개월 전부터요. 하지만 정확한 분석은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국방부 장관이 들어왔다. "무슨 상황인가요? 갑자기 긴급 소집이라고 해서..."


비서실장이 상황을 브리핑했다.


국방부 장관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렇다면 데프콘 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칫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어요. 계엄 준비도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성은 시계를 봤다. 50분.


"실장님, 대통령께서는 언제 오시나요?"

"지금 올라오고 계세요."


5분 후 대통령이 상황실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침중한 표정이었다.


"상황을 들었습니다. 정말 사실인가요?"

외교부 장관이 나섰다. "아직 공식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국 발표 이후에 뒷북치는 모양새가 되면..."

"하지만 각하, 아직 정확한 내용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발표는..."


참모들의 의견이 충돌했다. 현성은 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45분, 44분, 43분... 시간이 촉박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카운트다운 0:40


상황실의 전화가 울렸다. 미국 대사였다.


"각하, 주한 미국 대사입니다."

대통령이 스피커폰을 켰다. "네, 말씀하세요."

"소행성 충돌 관련 정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사실입니까?"

"네, 안타깝게도 사실입니다. 40분 후 백악관에서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사님, 발표를 조금 미뤄주실 수 없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것은 백악관의 결정사항입니다."

"그렇다면 백악관과 직접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만..."


현성이 나섰다. "대사님, 제가 워싱턴 쪽 연결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현성을 바라봤다. "할 수 있어요?"

"해보겠습니다."


현성은 휴대폰을 꺼내 민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받았다.


"민철아, 지금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고 싶어해. 연결해줄 수 있어?"

"뭐? 지금? 미친, 그게 어떻게..."

"부탁이야. 정말 중요해."


민철이 한숨을 쉬었다. "기다려봐.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