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극본 작법
'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에서 강의를 하고 필요한 드라마 작법과 스토리텔링에 대한 글을 정리하면서, 나는 수상한 패턴을 발견했다.
내가 자주 예시로 드는 작품들 '록키', '브레이킹 배드', '월E', '그래비티', '대부', '컨택트'
이 녀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DNA를 가진 가족이었던 것이다.
드라마는 관계다. 이건 영화 교과서 1페이지에 나오는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한 건 좀 다르다.
명작들이 그리는 관계는 십중팔구 '가족'이라는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든, 선택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든. 심지어 로봇들이 주인공인 '월E'에서도 그들은 가족처럼 행동한다. 외로움을 느끼는 로봇에게 캐릭터아크는 결국 '가족' 인 것이다.
록키. 이 남자, 30살이 넘도록 완전한 외톨이다. 친구라곤 거북이뿐이고, 혼자 중얼거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주변에 완벽한 가족이 형성되어 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아드리아나는 그의 연인이자 아내가 되고, 처음엔 록키를 못마땅해 하던 폴리는 어느새 든든한 형 같은 존재가 된다. 체육관 늙은이 미키는 록키가 평생 그리워했던 아버지가 되어준다.
혈연도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진짜 가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만드는 셈이다.
'그래비티' 에서 라이언 스톤 박사의 진짜 적은 우주의 무중력이 아니라 마음의 무중력이다. 4살 딸을 잃은 후부터 그녀는 지구에서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매일 밤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다. 딸의 흔적들이 너무 많아서. 우주에서의 90분은 결국 죽은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베테랑 우주인은 딸을 돌보는 아버지처럼 라이언을 보살피다 희생한다.
영화 마지막에 라이언이 지구로 돌아와 해변에서 일어서는 모습은 새로운 탄생이다. 마치 우주라는 거대한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내딛는다.
'브레이킹 배드' 의 월터. 이 남자는 입만 열면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시작부터 폐암에 걸려 얼마 못 살 것 같으니 가족들에게 돈을 남겨주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월터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이 남자는 가족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위해 마약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누구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던 월터에게 마약 제조는 처음으로 권력과 존재감을 준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위한다며 시작한 일이 결국 진짜 가족을 파괴해버렸다. 아내는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아들은 아버지를 거부한다. 시리즈 마지막에 월터는 모든 걸 잃고 혼자 죽어간다. 가족을 지키려던 남자가 가족에게 버림받는 비극이다.
'컨택트' 의 엘리 박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후 평생 그 어떤 것을 찾아 헤맨다. 우주에서 오는 신호를 찾는 것도 결국 잃어버린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다. 영화 마지막, 외계인이 그녀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어라이벌' 의 루이즈 박사는 더 직접적이다. 딸을 잃을 운명을 미리 알면서도 딸을 낳기로 선택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딸과 함께하는 게 그 슬픔보다 소중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치 운명에게 "그래, 아프더라도 사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대부' 는 말할 것도 없다. 비토 콜레오네의 모든 행동은 가족 보호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지키려던 마이클의 노력이 결국 가족을 파괴하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권력이 강해질수록 가족은 멀어진다. 마치 손에 모래를 꽉 쥘수록 더 많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에서도 매기와 프랭키는 혈연이 아니지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형성한다.
'월E'에서 로봇들조차 서로를 돌보고 보호하는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든다. 심지어 기계도 외로우면 가족을 만든다.
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작들은 가족에 집착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 의무감과 자유에 대한 갈망,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
가족 앞에서는 가면을 쓸 수가 없다. 가장 솔직한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탄생한다.
수강생들에게도 항상 이야기한다. 복잡한 설정이나 화려한 액션보다 중요한 건 관계라고.
관객이 감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모든 사건들이 의미를 갖는다고. 그리고 그 관계의 가장 강력한 형태는 언제나 가족이라고. 혈연이든 선택이든.
다음 기수의 작가교육원 강의에서도 나는 수강생들과 함께 관계를 들여다볼 것이다. 누군가 물어올지 모른다. "왜 그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날까요?"
그때 나는 말 할수 있다. "그건 네가 가족과 관계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야."
드라마는 결국, '가족'과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