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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8. 지구 멸망 8일 후.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했다. 시스템 점검, 통신 시도, 지구 관측, 식사, 운동, 수면. 마치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하지만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통신을 시도할 때 예전보다 더 많이 말하게 되었다.
"여기는 권성준입니다. 8일째 시도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 목소리가 들리면... 누구든지 응답해주세요."
침묵.
"저는... 저는 정말 혼자인가요? 75억 명 중에 정말 아무도 남지 않은 건가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우주정거장의 좁은 공간에 메아리쳤다.
"제발... 제발 누군가..."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모니터에 희미한 신호가 잡혔다. 잡음 같은 것이었지만, 분명히 뭔가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것은 정거장의 전자장비에서 나는 잡음이었다. 내가 너무 간절히 바라서 없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아니구나."
그날부터 혼잣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영아,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 맞다. 지영이는 이제..."
말을 멈췄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민우는... 민우는 그 소녀와 함께 있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사진 속 민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혼잣말은 계속됐다.
"오늘 메뉴는 비프 스튜야. 지영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지영이가 만든 마지막음식이 뭐였지?"
식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19개월간 혼자 먹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잠시 혼자'였다. 이제는 '영원히 혼자'였다.
오후에 지구를 관측하면서도 계속 말했다.
"한국이 있던 자리가... 저기 어디쯤일까? 서울이... 우리 집이 있던 곳이..."
망원경으로 지구 표면을 자세히 봤다. 먼지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지역은 보이지 않았다. 대기는 이상한 색깔로 변해있었다. 갈색과 회색이 뒤섞인.
"공기가 저렇게 더러워졌구나.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혹시... 혹시나 해서..."
또 통신을 시도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8일째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거장도 정상입니다. 혹시 누군가 듣고 계시다면... 응답하지 못하더라도, 들리기만 한다면..."
목이 메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저녁 운동 시간에도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민우야, 아빠가 우주에서 운동하고 있어. 네가 좋아하던 팔굽혀펴기 말이야. 무중력에서는 좀 다르지만."
런닝머신을 뛰면서도 계속 말했다.
"지영아, 살 좀 빠진 것 같지? 스트레스 때문인가? 아니면 우주식량이 맛없어서인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죽은 사람들과?
아니면... 내 상상 속의 사람들과?
그 생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내일은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까?"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똑같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점점 더 많이 혼잣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침낭에 몸을 고정하고 눈을 감았다. 무중력 상태에서 잠드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19개월이 지나도 가끔은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꿈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구에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거리는 텅 비어있었고, 건물들은 반쪽이 무너져있었다.
"지영아! 민우야!"
나는 소리쳤다. 메아리만 돌아왔다. 집으로 뛰어갔다. 우리 아파트로. 하지만 아파트는... 아파트는 검은 재로 변해있었다.
"안 돼... 안 돼..."
재를 헤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부엌, 침실... 모든 것이 재로 덮여있었다. 그때 침실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봤다.
"지영아?"
다가가보니... 그것은 지영이 아니었다. 백골이었다. 하얀 뼈만 남은 백골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백골이 고개를 돌렸다. 눈구멍이 나를 바라봤다.
"왜 구하지 못했어?"
백골의 입에서 지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왜 혼자만 살아남았어?"
"아니야... 아니야, 지영아. 내가... 내가 어떻게..."
그때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돌아보니 민우가 서 있었다. 하지만 민우도... 민우도 백골이었다. 교복을 입은 백골.
"아빠는 왜 우리를 버리고 우주로 갔어?"
"민우야... 아빠는..."
"아빠 때문에 우리가 죽었어."
"아니야! 아니야!"
나는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발밑에 뭔가 있었다. 내려다보니... 수많은 백골들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75억 개의 백골들.
"너 때문이야."
"네가 살아남아서 우리가 죽었어."
"왜 혼자만 살아남았어?"
모든 해골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나는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계속 들렸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소리.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백골들이 나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
"네가 죽어야 해!"
"우리 대신 네가 죽어야 해!"
"혼자 살 자격은 없어!"
백골의 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차가운 뼈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아아악!"
"아악!"
나는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떠다니고 있었다. 침낭에서 벗어나 정거장 한가운데 공중에 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잠들 때 몸을 고정해야 한다. 그런데 잠을 자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몸부림을 쳤나보다. 침낭 고정끈이 풀려있었다.
방향감각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알 수 없었다. 벽과 천장의 구분이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나는 완전히 길을 잃었다. 손을 뻗어 벽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공간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꿈속의 공포와는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현실적인, 생리적인 공포.
인간은 중력을 기준으로 방향을 인식한다. 위아래, 앞뒤, 좌우. 하지만 무중력에서는 그 모든 기준이 사라진다. 뇌가 혼란스러워한다. 19개월 동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몸이 다시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진정해... 진정하자."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주비행사 훈련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패닉을 일으키면 안 된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벽을 찾았다. 다행히 손끝에 뭔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벽이었다.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의 방향을 잡았다. 그제야 어디가 '위' 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디가 정거장의 '바닥' 으로 설정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이 계속 떠올랐다. 백골들의 목소리, 지영과 민우의 원망, 75억 명의 죽음.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죄책감이 꿈틀거렸다.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
왜 하필 나만?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14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다시 잠들기가 무서웠다. 꿈을 꿀까 봐. 나는 관측창으로 향했다. 지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회색빛 먼지구름으로 덮여있었다.
"지영아... 정말 미안해."
창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
"민우야... 아빠가 정말... 정말 미안해."
눈물이 흘렀다. 무중력에서 눈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눈 위에 동글동글한 물방울로 맺힐 뿐이다.
그 작은 물방울들이 내 시야를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