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목격자

8

by 꼬불이

D+21. 지구 멸망 21일 후.


3주가 지났다. 통신 시도는 이제 하루에 10번 이상 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도 없었다. 그냥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마다.


"여기는 권성준입니다. 21일째입니다. 누구든지... 누구든지 응답해주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너무 많이 말해서 목이 쉬었다.


"저는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혼자... 혼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묵.


"제발... 제발 누군가..."


이제는 통신이 끝난 후에도 계속 말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구나. 정말 아무도."


식사 시간에도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지영아, 오늘은 닭고기야. 네가 좋아하던 그 닭갈비 맛은 아니지만... 어때, 맛있어 보이지?"


빈 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지영이 거기 앉아있는 것처럼.


"민우는... 민우는 뭘 좋아했더라? 아, 치킨. 치킨을 좋아했지. 미안해, 여기는 치킨이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웃음이었다. 슬프면서도 히스테리컬한.


"아빠가 우주에서 치킨을 배달시켜줄 수는 없잖아?"


웃음이 울음으로 바뀌었다.




운동할 때도 대화는 계속됐다.


"민우야, 아빠 지금 팔굽혀펴기 하고 있어. 100개 할 수 있나 볼까?"

"하나, 둘, 셋..."

"아빠 대단하지? 19개월 동안 계속 운동했거든."


그러다 갑자기 멈췄다.


"...넌 이제 볼 수 없지."


팔에 힘이 빠졌다. 바닥에 떨어질 뻔했지만, 무중력이라 그냥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왜 난 여기 있고, 넌 저기 있어야 하는 거야?"



밤이 되면 더 심해졌다.


"지영아, 잠들기 전에 얘기 좀 하자."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아, 맞다. 너희는 이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아니야. 너희는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거야. 그렇지?"


사진 속 지영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웃어줘. 아빠가... 아빠가 무너질까 봐 웃어주는 거야?"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진 속 지영이 정말로 웃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 같았다.


"지영아?"


더 자세히 봤다. 하지만 그냥 사진이었다. 변하지 않는, 정지된 이미지.


"내가... 내가 이상해지는 건가?"


그런 일들이 점점 자주 일어났다. 모니터의 반사된 내 모습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정거장의 기계음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D+23.


"여기는... 여기는 권성준입니다."


통신을 시도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내가 누구였지?

권성준? 맞나?


잠시 기억이 희미해졌다. 나는 왜 여기 있지? 여기가 어디지?


"아... 아, 맞다. 나는 권성준이고, 여기는 국제우주정거장이고..."


기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혼란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 정신을 차리자."


하지만 그럴수록 더 이상해졌다.




D+25.


그날 아침 나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통신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의미가 없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의무실로 향했다. 약장을 열었다. 각종 의약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진통제, 수면제, 그리고... 모르핀.


"이걸로 하면 아프지 않을까?"


모르핀 병을 꺼냈다. 치명적인 용량을 계산했다. 우주비행사 훈련에서 배운 의학 지식이 이런 곳에 쓰일 줄이야.


주사기에 약물을 준비했다.


"지영아, 민우야. 아빠가 곧 갈게."


팔에 고무줄을 감았다. 핏줄이 도드라졌다.


"미안해. 혼자 남겨놔서 미안해."


바늘을 팔에 가져갔다. 그 순간, 환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갑자기 다른 곳에 있었다. 깊은 동굴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따뜻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스페인어 억양이 있는 한국어.


"저는... 저는 권성준입니다."

"우주에서 오신 거죠? 우리를 도우러 오신 거죠?"

"우주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살아있었다.


"당신이 희망입니다."


여자가 말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선명했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고?"

"네. 우주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분을."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민우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민우가 서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와는 달랐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아빠, 아직 시간이 아니야."

"민우야..."

"사람들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 이 사람들 말이야."


민우가 동굴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빠가 포기하면, 이 사람들도 포기해. 아빠가 희망을 잃으면, 이 사람들도 희망을 잃어."

"하지만... 난 너무 외로워."

"조금만 더 기다려, 아빠. 정말 조금만."


지영도 나타났다.


"성준아, 우리는 괜찮아. 하지만 저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어. 그들을 도와줘."

"어떻게? 나는 여기 갇혀있는데."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환상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정거장의 의무실에 있었다. 주사기가 손에 들려있었다. 하지만 아직 주사하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조금만 더?"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그날은 자살하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이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마리아... 그 사람 이름이 마리아였나?"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환각일 수도 있었으니까.


"다음에는... 다음에는 정말로 할까?"


그 생각이 오히려 나를 안정시켰다. 언제든지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절망적이지만 유일한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