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빌보드": 두 개의 캐릭터 아크

영화이야기

by 꼬불이

8문장 줄거리 요약


"쓰리빌보드"


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 / 우디 해럴슨 / 샘 록웰 외




8문장 줄거리 요약


미주리 주 작은 마을 에빙에서 딸 앤젤라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지 7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경찰은 아무런 진전도 없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마을 외곽의 세 개 광고판을 빌려 경찰서장 윌로비를 향한 도발적 메시지를 내건다.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됐는데", "아직도 체포자가 없나요?", "윌로비 서장님?"



마을 사람들은 암으로 죽어가는 윌로비를 존경하기에 밀드레드를 비난한다. 윌로비의 부하인 딕슨은 폭력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경찰로, 밀드레드를 적대시한다. 윌로비가 자살하고, 딕슨은 광고판 회사 직원을 폭행해 해고당한다. 밀드레드는 분노에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고, 우연히 그 안에 있던 딕슨이 중화상을 입는다.



"복수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복수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2017)


주인공은 명백히 밀드레드다.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이 강인한 어머니가 모든 장면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런데... 샘 록웰이 연기한 제이슨 딕슨. 처음에는 밀드레드의 명백한 적대자였던 이 남자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 두 사람은 놀랍게도 같은 차 안에 앉아 있다. 복수를 위해. 아니, 어쩌면 복수가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해.


이것이 『쓰리 빌보드』가 특별한 이유다. 하나의 캐릭터 아크도 아니고,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개의 아크도 아니다. 처음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던 두 개의 아크가 서서히 수렴하여 마침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야기.



밀드레드 헤이즈: 분노에서 의심으로
초반의 밀드레드: 순수한 분노


영화가 시작될 때 밀드레드는 이미 완성된 사람처럼 보인다. 7개월 전 딸이 살해당했다. 경찰은 아무것도 못 찾았다. 밀드레드는 행동에 나선다. 망가진 광고판 세 개를 빌려 전 마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메시지를 걸어놓는다.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됐는데"

"아직도 체포자가 없나요?"

"윌로비 서장님?"


냉혹하고 직설적이며 타협이 없다. 밀드레드의 초기 '장애' 는 명확하다.


외면적 장애: 딸을 죽인 범인을 찾을 수 없음. 경찰의 무능. 마을 전체의 적대.

내면적 장애: 통제할 수 없는 분노. 죄책감(딸이 나가던 날 밤 싸웠던 기억 - 앤젤라가 "강간당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밀드레드도 동의해버렸다). 슬픔을 표현할 방법의 부재.



밀드레드의 '초목표' 역시 명확해 보인다.


외면적 초목표: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는 것.

내면적 초목표: 이건 조금 더 복잡하다. 표면적으로는 정의 구현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죄책감을 씻어내는 것. 딸에게 했던 말 - 앤젤라가 "강간당했으면 좋겠어"라고 했을 때 밀드레드도 동의해버린 것 - 을 되돌리고 싶은 것.


하지만 초반의 밀드레드는 이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다. 범인을 찾는 것. 나머지는 전부 방해물일 뿐이다.




"윌로비의 편지": 첫 번째 균열


윌로비 서장이 자살한다. 암 때문이지 밀드레드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밀드레드를 비난한다. 그리고 윌로비는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남긴다.


"분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정심과 생각은 해결책을 찾아줍니다."


이 순간, 밀드레드의 내면에 첫 균열이 생긴다.


윌로비는 적이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고, 최선을 다했고, 그녀의 고통을 이해했다. 밀드레드의 분노가 잘못된 대상을 향했던 것일까?


하지만 밀드레드는 아직 이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분노는 그녀가 가진 유일한 에너지원이다. 분노를 놓으면 무너질 것 같다.



"방화": 분노의 정점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다. 이것은 그녀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한 순간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시스템을 불태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딕슨이 화상을 입는다.


죽을 뻔했던 딕슨을 구한 것은 밀드레드의 지인인 제임스. 그가 불타는 딕슨의 옷을 끄고 밀드레드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이 아이러니를 밀드레드는 나중에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 균열이 된다.



"아이다호 바": 의심의 시작


술집에서 밀드레드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앤젤라를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드디어 찾았다. 7개월간 찾던 바로 그 남자를.


밀드레드는 그를 칼로 찌른다. 목을 겨눈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하고, DNA 검사 결과 그는 범인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단지 여자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사이코패스였을 뿐.


이 순간, 밀드레드는 깨닫는다. 자신의 분노가 얼마나 위험한지. 무고한 사람을 죽일 뻔했다는 것을.



"결말": 확신에서 의심으로


영화 마지막, 밀드레드와 딕슨은 차에 탄다. 딕슨이 술집에서 우연히 들은 남자 - 강간과 살인을 자랑하던 군인 - 를 죽이러 가는 길이다.


"확실해?" 밀드레드가 묻는다.

"아니." 딕슨이 대답한다.

"나도 확실하지 않아."

"가는 동안 결정하자."


이것이 밀드레드의 캐릭터 아크다.


초반: 확신에 찬 분노. "나는 옳고 세상이 틀렸다."

결말: 의심하는 용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밀드레드는 여전히 딸을 사랑한다. 여전히 정의를 원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안다.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은 때로 위험하다는 것을.


딸을 죽인 범인은 찾지 못했다. 외면적 초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면적 초목표 -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 는 다른 방식으로 달성되었다. 밀드레드는 자신을 용서했다.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제이슨 딕슨: 증오에서 연민으로
초반의 딕슨: 순수한 증오


딕슨은 전형적인 악역으로 등장한다.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고, 멍청하고, 엄마한테 집착하는 마흔 살 경찰. 윌로비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밀드레드를 적대시한다.


영화 초반, 딕슨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렇다.


흑인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소문

광고판 회사 직원 웰비를 2층 창문 밖으로 던짐

어머니와의 유아적 관계

만화책 읽는 모습


딕슨은 밀드레드의 완벽한 대척점이다.


밀드레드는 정의를 추구한다(잘못된 방식이긴 하지만).

딕슨은 권력을 휘두른다.


밀드레드는 지적이다.

딕슨은 멍청하다.


밀드레드는 독립적이다.

딕슨은 의존적이다.


이런 캐릭터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윌로비의 편지": 씨앗이 뿌려지다


윌로비는 딕슨에게도 편지를 남긴다.


"자네에게는 사랑이 부족해, 딕슨. 자네 마음속 어딘가에 사랑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내. 그게 좋은 형사가 되는 길이야."


딕슨은 이 편지를 읽고 운다. 이것이 변화의 씨앗이다. 딕슨은 윌로비를 사랑했다. 그리고 윌로비는 딕슨을 믿었다. "좋은 형사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씨앗은 당장 싹이 트지 않는다.



"화상": 몸이 타다


밀드레드가 던진 화염병. 딕슨은 2층에서 서류를 읽고 있다가 불에 타기 시작한다.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다시 불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왜? 앤젤라 사건 서류를 가져오기 위해.


이 장면이 결정적이다. 딕슨은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자신의 몸보다 사건 서류가 중요하다고. 그는 더 이상 멍청한 경찰이 아니다. 진짜 형사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그를 구하나? 밀드레드의 지인 제임스다. 불타는 딕슨의 옷을 끄고 밀드레드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병원": 연민을 배우다


화상 치료를 받는 딕슨. 온몸이 붕대로 감겨 있다.

옆 병실에는 웰비가 있다. 딕슨이 폭행해서 입원한.

딕슨은 웰비에게 사과한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진심이다.

웰비는 잠시 화난 표정을 짓다가 딕슨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넨다. 빨대까지 꽂아서.


이것이 딕슨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술집": 진짜 형사가 되다


딕슨은 더 이상 경찰이 아니다. 해고당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앤젤라 사건을 추적한다.


술집에서 우연히 한 군인을 만난다. 그는 술에 취해 강간과 살인을 자랑한다. "아이다호에서."

딕슨은 조용히 듣는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시비를 건다. 싸움이 벌어진다. 딕슨은 얻어맞는다. 화상 입은 몸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DNA 샘플을 얻기 위해. 화상 입은 얼굴로, 경찰 신분도 없이, 맞으면서도, 딕슨은 진짜 형사가 되었다.



"결말": 확신에서 의심으로


DNA 결과가 나온다. 그 군인은 앤젤라를 죽인 범인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여자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딕슨은 밀드레드에게 전화한다.


"같이 그 새끼 죽이러 갈래?"

"확실해?"

"아니."


이것이 딕슨의 캐릭터 아크다.


초반: 맹목적 확신. "내가 옳고 너는 틀렸어."

결말: 불확실성을 받아들임. "나도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해볼 가치는 있어."


딕슨은 여전히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생각한다. 의심한다. 연민을 배웠다.


외면적 변화: 무능한 경찰 → 유능한 형사

내면적 변화: 증오에 찬 인간 → 사랑을 배우는 인간


윌로비가 편지에서 말한 것. "사랑을 찾아내." 딕슨은 그것을 찾았다. 자기 방식으로.




두 개의 아크, 하나의 방향


밀드레드와 딕슨은 정반대에서 시작한다.

한 명은 정의를 추구하고, 한 명은 권력을 휘두른다.

한 명은 피해자이고, 한 명은 가해자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분노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딕슨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두 사람은 같은 차에 탄다.


이건 단순한 팀업이 아니다. 두 개의 캐릭터 아크가 하나로 수렴한 순간이다.


밀드레드는 이제 딕슨을 적으로 보지 않는다.

딕슨은 이제 밀드레드를 공격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깨달음에 도달했다.

확신은 위험하다.

의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동해야 한다.



"윌로비의 유령": 보이지 않는 주인공


흥미롭게도 『쓰리 빌보드』에는 세 번째 캐릭터가 있다.


윌로비 서장.


그는 영화 중반에 죽는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계속된다.


밀드레드에게 남긴 편지: "분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딕슨에게 남긴 편지: "사랑을 찾아내세요."

광고판 임대료를 한 달 치 미리 지불해놓은 것.


윌로비는 죽었지만, 그의 지혜가 두 사람을 변화시킨다. 어떻게 보면 윌로비야말로 진짜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한다.




감독 마틴 맥도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다."


『쓰리 빌보드』는 이 철학의 완벽한 구현이다.


밀드레드는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다. 그녀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또한 파괴적이다.

딕슨은 가해자지만 동시에 피해자다. 그는 폭력적이지만 또한 불쌍하다.

윌로비는 선량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딕슨 같은 경찰을 그대로 둔 것도 그의 실수다.


심지어 딸 앤젤라도 완벽한 희생자가 아니다. 엄마와 싸우고, 반항하고, 위험한 행동을 했다.


모든 캐릭터가 회색이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진실하다.



"응원 가능성": 결함이 있는 영웅들


"모든 주인공은 응원이 가능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그리고 『쓰리 빌보드』는 이것을 증명한다.


밀드레드는 공격적이고, 거칠고, 때로 잔인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응원한다. 왜?


딸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이 진실하기 때문에

무능한 시스템에 맞서는 용기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딕슨은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고, 멍청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왜?


그도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어머니와의 관계)

진심으로 변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웰비에게 사과하고 앤젤라 사건을 추적하기 때문에


완벽한 영웅은 지루하다. 결함이 있는 영웅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결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영웅이 감동적이다.




『쓰리 빌보드』는 어떤 장르인가?


범죄 스릴러? 아니다. 범인을 찾지 못한다.

복수극? 아니다. 복수를 실행하지 않는다.

드라마? 코미디?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니다.


맥도나는 장르의 기대를 계속 배신한다.


우리는 밀드레드가 범인을 찾을 거라고 기대한다. 못 찾는다.

우리는 딕슨이 벌을 받을 거라고 기대한다. 오히려 구원받는다.

우리는 마지막에 총격전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한다. 두 사람은 그냥 운전한다.


이것이 바로 진짜 예술이다. 관객의 기대를 뒤엎으면서도 만족을 준다.


그리고 AI 는 이런 변주를 창조 하지 못한다.


쓰리 빌보드의 상징인 세 개의 광고판.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됐는데"

"아직도 체포자가 없나요?"

"윌로비 서장님?"


이 광고판들은 밀드레드의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대로 서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서 있다.


왜?


범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의는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광고판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더 이상 고발이 아니라 추모다. 더 이상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다.


그리고 어쩌면 희망이다. 언젠가는 정의가 올 거라는.





"마무리": 열린 결말의 힘


영화는 닫혀 있지 않다.


밀드레드와 딕슨이 그 군인을 죽일까? 모른다.

그가 정말 다른 여자를 죽였을까? 모른다.

앤젤라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모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게 요점이다. 삶은 불확실하다. 정의는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의심하면서도 행동한다.


"가는 동안 결정하자."


이것이 『쓰리 빌보드』가 전하는 메시지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나는 원톱 주인공 구조를 선호한다.


『록키』: 록키 발보아 한 명의 여정. 자존감 회복.

『그래비티』: 라이언 스톤 한 명의 생존. 삶의 의지 회복.


이 두 작품은 완벽한 주인공 중심 구조다.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는 다르다.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약점처럼 보일 수 있다. 집중력이 흐려질 수 있다. 하지만 맥도나는 이것을 강점으로 만들었다. 두 개의 아크가 서로를 강화한다.


밀드레드의 변화는 딕슨의 변화 없이는 의미가 없다.

딕슨의 변화는 밀드레드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록키』나 『그래비티』와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더 복잡하지만, 어쩌면 더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우리는 혼자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킨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도 복잡한 캐릭터다.


선생님에서 마약왕으로.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타락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와 딕슨도 마찬가지다.


밀드레드는 타락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된다. 완벽한 피해자에서 결함 있는 인간으로.

딕슨은 개과천선하는 게 아니라 성장한다. 증오에서 연민으로.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변화는 직선이 아니다.




『쓰리 빌보드』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1. 적대자도 아크를 가질 수 있다

딕슨은 밀드레드의 적대자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변화한다.

적대자를 단순한 장애물로만 쓰지 마라. 그들에게도 여정을 주어라.



2. 외면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된다

밀드레드는 범인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성장한다.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변화다.



3. 도덕적 복잡성을 두려워하지 마라

밀드레드는 동정적이면서 폭력적이다. 딕슨은 혐오스러우면서 불쌍하다.

회색 캐릭터가 흑백 캐릭터보다 강력하다.



4. 대사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어라

딕슨이 불타는 건물에 다시 들어가는 장면. 대사 없이 그의 변화를 보여준다.

웰비가 딕슨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는 장면. 연민에 대한 긴 설명 없이 행동으로 보여준다.



5. 상징을 과도하게 설명하지 마라

세 개의 광고판. 영화는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이 스스로 해석하게 한다.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샘 록웰"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밀드레드를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분노와 강인함이 새겨져 있다.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한다.


특히 윌로비의 편지를 읽는 장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우리는 그녀의 마음이 무너지는 걸 본다.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 있다.

마지막 차 안 장면. "확실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용기가 동시에 있다.



샘 록웰은 딕슨을 혐오스럽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동정심을 자아낸다. 그는 딕슨을 만화 같은 악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웰비를 창밖으로 던지는 장면. 록웰의 연기에는 분노뿐 아니라 무력함이 있다. 그는 화가 났지만, 왜 화가 났는지 모른다.

불타는 장면. 온몸에 불이 붙었지만 다시 건물로 들어간다. 록웰의 표정에는 결의가 있다.

병원에서 웰비에게 사과하는 장면. 어색하고 서툴지만 진심이다. 록웰은 이것을 과장하지 않는다.


두 배우 모두 오스카를 받았다. 당연하다.




"맥도나 감독의 대사와 빙산이론"


마틴 맥도나는 희곡 작가 출신이다. 그의 대사는 날카롭고 재치있다.


"딸이 불에 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우린 비슷해지겠네."

"강간? 미주리에서는 아직도 합법 아닌가?"

"분노는 너한테 쓴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엄마, 광고판 태우면 안 돼요?"

"책 읽는 거 싫어. 머리 아파."

"나 좋은 경찰 될 수 있죠?"


"자네에게는 사랑이 부족해, 딕슨."

"분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평정심과 생각이 해결책을 찾아줍니다."


맥도나의 대사는 여러 층위를 가진다. 표면적 의미와 숨겨진 의미.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이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딕슨은 마마보이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엄마가 딕슨을 "baby"라고 부르는 것. 딕슨이 엄마 앞에서 순해지는 것. 우리는 안다. 딕슨의 폭력성이 어디서 왔는지.


제임스가 불타는 딕슨을 구한 후, 딕슨은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같은 병실에 누가 있나? 며칠 전 딕슨에게 폭행당해 2층 창문 밖으로 던져진 웰비다.


웰비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냥 한다. 딕슨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넨다. 빨대까지 꽂아서. 딕슨은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다. 웰비는 잠시 화난 표정을 짓다가 용서한다.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한다.




"내면적 초목표의 중요성"


밀드레드의 외면적 목표는 실패했다(범인을 못 찾음).

하지만 내면적 목표는 성공했다(죄책감에서 해방).


딕슨의 외면적 목표도 실패했다(범인이 아니었음).

하지만 내면적 목표는 성공했다(사랑을 배움).


관객은 외면적 성공보다 내면적 성장에 더 감동한다.



"응원 가능성"


밀드레드는 완벽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도 폭력적이다.

딕슨은 전형적 악역이 아니다. 그도 변화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응원받을 수 있다. 변화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2017년. 『쓰리 빌보드』가 개봉한 해.


트럼프 시대. 미투 운동. 흑백논리. 소셜미디어의 분노. 모두가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쓰리 빌보드』는 조용히 말한다.


"너도 틀릴 수 있어. 나도 틀릴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밀드레드와 딕슨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가보자."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다.



두 개의 캐릭터 아크가 만든 기적.


확신에서 의심으로.

증오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마침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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