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는 이렇게 시작했다. 마치 동화를 들려주듯. 하지만 이 동화는 달랐다. 공주가 왕자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 소녀가 나치를 불태우는 이야기였다.
2009년, 쿠엔틴 타란티노가 선보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영화가 역사에 복수하는 밀도 높은 연극무대.
1944년 나치 점령하 프랑스. 유대인 소녀 쇼샨나는 가족이 나치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홀로 탈출한다.
4년 후, 그녀는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에마뉘엘이라는 가명으로 살아간다.
한편 알도 레인 중위가 이끄는 미군 특수부대 '바스터즈'는 나치를 잔혹하게 사냥하며 공포를 퍼뜨린다.
운명의 날, 나치 고위급들이 쇼샨나의 극장에서 독일 선전 영화의 시사회를 열기로 한다.
쇼샨나는 복수를 계획하고, 바스터즈도 같은 장소를 노린다.
나는 습작생들에게 제1원칙이라고 하며 '주인공은 하나다.' 라고 가르친다. 이중 삼중 구조의 멀티플 구성은 이제 막 습작과 데뷰를 앞둔 작가지망생들에겐 독이기 때문이다.
『바스터즈』의 독특함은 주인공이 크게 두 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치밀하고 교묘하게 묶여있다.
'주인공은 하나다' 란 원칙을 잊지 말라. 하지만 초고단수의 작가이자 감독이 어떻게 이중 구조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지는 알고 있자. 언젠간 당신도 할수 있다.
외면적 장애: 나치 점령하 프랑스에서 유대인으로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상황. 정체가 발각되면 즉시 죽음이다. 극장 운영이라는 평범한 일상 뒤에 숨은 끝없는 공포.
내면적 장애: 가족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복수 욕망.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그리고 그 무력감을 복수로 바꾸려는 의지.
외면적 초목표: 극장에서 나치 고위급들을 제거하기.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목표. 영화 상영 중 극장을 불태워 나치들을 몰살시키는 것.
내면적 초목표: 가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존재 증명.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행위. 희생양에서 심판자로의 전환.
외면적 장애: 제한된 인원과 자원으로 거대한 나치에 맞서야 하는 상황. 8명의 소수 정예 부대. 적진 한복판에서 벌이는 게릴라전. 압도적으로 불리한 숫자.
내면적 장애: 나치에 대한 개인적 증오와 정의 실현 의지. 아파치 인디언 혈통의 미군 장교. 나치즘이라는 절대악에 대한 원시적 분노.
외면적 초목표: 나치 고위급 암살작전 성공.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작전.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수뇌부 제거.
내면적 초목표: 악에 대한 완전한 응징.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도덕적 심판. 나치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철저한 복수.
나치라는 절대악 앞에서 쇼샨나와 알도는 자동으로 선악구조의 선 편에 선다.
히틀러를 죽이는 영화를 싫어할 관객이 있을까?
타란티노는 가장 확실한 악역을 선택함으로써 주인공들의 응원 가능성을 극대화했다.
8명 vs 나치 독일 // 소녀 한 명 vs 점령군 전체.
수적으로 압도적 열세. 자원도 부족하고 화력도 딸린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의지가 있다.
『록키』의 록키 발보아가 아폴로 크리드에게 도전했듯,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가 경찰서 전체에 맞섰듯,
바스터즈도 거대한 적에 맞선 용감한 도전자들이다.
개인적 복수가 아니라 역사적 정의다. 쇼샨나의 가족은 무고했다. 바스터즈가 상대하는 나치들은 전쟁범죄자들이다. 이들의 복수는 개인적 원한을 넘어선 인류애적 차원의 응징이다.
시작: 무력한 희생자. 가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던 소녀. 도망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존재.
중간: 숨어서 견디는 생존자. 가명을 쓰고 극장을 운영하며 평범한 삶을 가장하는 상태. 하지만 내면의 분노는 계속 타오른다.
결말: 복수를 완성하는 심판자. 극장을 불태우며 나치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 희생양이 아니라 심판자로서의 죽음을 맞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쇼샨나의 얼굴이 화염과 연기 속에서 웃으며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치는 소녀가 아니다. 복수를 완성한 여신이다.
시작: 분노에 사로잡힌 군인. 나치에 대한 원시적 증오만 있을 뿐, 구체적 계획은 없는 상태.
중간: 전략적 사고를 하는 지휘관. 바스터즈를 이끌며 체계적으로 나치들을 사냥하는 단계. 분노를 전략으로 승화시킨다.
결말: 임무를 완수한 전사. 히틀러 암살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를 달성. 개인적 복수를 역사적 승리로 만들어낸다.
실제 역사에서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히틀러는 극장에서 기관총에 맞아 죽는다. 이것이 바로 『바스터즈』의 핵심이다. 영화가 역사를 다시 쓰는 것.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완전한 복수를 영화에서 완성하는 것.
영화 속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복수극. 영화를 보던 나치들이 영화 때문에 죽는다.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시네마 자체의 복수다. 선전 도구로 이용당했던 영화가 마침내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
타란티노는 『장고』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악에 대한 영화적 복수. 두 영화 모두 '만약에'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완전한 복수를 했다면? 만약 노예가 주인을 죽이고 자유를 쟁취했다면? 역사가 주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영화가 대신 제공하는 것이다.
『바스터즈』는 전쟁 영화지만 서부극의 DNA를 갖고 있다.
알도 레인은 현대판 총잡이다. 나치들에게 두피를 요구하는 모습은 인디언 사냥꾼을 연상시킨다. 바스터즈의 잔혹한 정의 구현은 서부극의 자경단과 닮았다.
『그래비티』가 생존 스릴러의 완성형이라면, 『바스터즈』는 복수극의 새로운 진화다.
개인의 복수를 역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것.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개인적 원수를 갚았다면, 쇼샨나는 민족적 원수를 갚는다.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기한 한스 란다는 말로 사람을 죽이는 악역이다. 첫 장면에서 프랑스 농부를 심문하는 대화. 점잖고 예의바른 말투지만 그 안에는 냉혹한 살의가 숨어있다. 우유 한 잔을 권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조성한다. 이는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이다. 폭력보다 강한 대화의 힘.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말로 상대를 조종했듯, 란다도 말로 상황을 지배한다. 하지만 『바스터즈』에서는 그 언어적 지배가 결국 무너진다. 쇼샨나의 침묵과 알도의 행동이 란다의 말재주를 압도한다.
복수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의 정당성이다.
나치라는 절대악을 설정함으로써 타란티노는 어떤 잔혹한 복수도 정당화할 수 있게 됐다.
관객은 죄책감 없이 폭력을 즐길 수 있다.
현대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동 성범죄자, 연쇄살인마, 권력을 남용하는 부패한 정치인.
이런 절대악 앞에서는 주인공의 복수가 더욱 강력해진다.
쇼샨나의 복수는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역사적이다.
개인의 상처를 사회적 정의와 연결시킬 때, 복수는 단순한 원한 해결을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가 딸의 죽음을 통해 경찰의 무능을 고발한 것처럼.
타란티노는 히틀러를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얼굴을 기관총으로 갈겨버렸다.
복수극에서는 절제보다 과잉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적당한 응징이 아니라 완전한 파멸이다.
표면적으로는 명확한 액션 영화다.
바스터즈의 나치 사냥, 쇼샨나의 복수 계획, 극장에서의 최종 대결.
관객은 이 스릴러적 재미를 따라간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허구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
예술이 정치적 행동이 될 수 있는가?
타란티노는 이런 질문들을 직접 묻지 않는다. 대신 쇼샨나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단순한 복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역사에게 주는 선물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정의를 영화에서라도 실현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쇼샨나가 극장을 불태우며 웃는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꿈의 실현 도구라는 것을.
타란티노는 증명했다. 영화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과거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바꿀 수 있다고.
히틀러는 벙커에서 죽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극장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영화적 죽음이 때로는 현실의 죽음보다 더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이것이 바로 타란티노가 우리에게 선사한 거친 선물이다.
복수는 달콤하다. 특히 그것이 영화 속에서 벌어질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