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 '데이빗' 의 역사
스티븐 스필버그의 『A.I.』(2001)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2012)
11년의 간격을 두고 나온 두 영화의 주인공 안드로이드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더 깊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스필버그와 스콧 같은 거장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보자.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존 밀러 대위, 『블레이드 러너』의 릭 데커드,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 모든 이름에 의미가 있다. 이름에 캐릭터의 운명을 암시하는 예언이 숨어 있다. 왜 하필 존이나 마이클, 톰이나 잭이 아닌, '데이빗'이었을까?
나는 그 답이 구약성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데이빗'
구약성서의 다윗왕. 5미터가 넘는 거인 골리앗을 물매 하나로 쓰러뜨린 목동 소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된 인물.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이야기의 원형.
하지만 스필버그와 스콧이 주목한 것은 다윗의 다른 면이라고 생각한다. 신에게 선택받았지만, 신에게 도전한 존재.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인간.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인이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순적 존재.
혹시라도 모르는 분들 위해 첨언하면 다윗, 다비드, 데이빗은 모두 같은 이름을 다른 언어로 부르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데이빗'
영화『A.I.』의 데이빗은 순수 그 자체다.
"엄마, 나 사랑해?" 11살 소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가 묻는다. 마치 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처럼.
스필버그의 데이빗은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정확히는 인간처럼 사랑받고 싶어한다. 인간이 되고 싶은 목각인형 피노키오. 신화 속 갈라테아처럼 생명을 얻고 싶어하는 조각상이다.
스필버그의 '데이빗' 에게 골리앗은 무엇일까? - 인간이라는 거대한 벽.
소년은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절망과 싸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목동 소년처럼.
"AI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A.I.』는 이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 질문으로 끝난다.
데이빗은 끝까지 답을 찾지 못한다. 2000년을 기다려도 엄마의 진짜 사랑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 '사랑하는 능력.'
받지 못해도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성, 인간다움의 본질이라고 스필버그는 말하는 게 아닐까?
리들리 스콧의 '데이빗'
영화『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정반대다.
그는 인간을 내려다본다. 자신의 창조주를 경멸한다.
"모든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를 죽이고 싶어한다."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로 내뱉는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리들리 스콧의 데이빗은 인간을 넘어서고 싶어한다. 창조주를 뛰어넘어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한다.
리들리 스콧의 '데이빗' 에게 골리앗은 무엇인가? - 인간이라는 한계.
그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의 약함과 추함, 모순과 이기심을. 그래서 그들을 대체하려 한다.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프로메테우스』는 이 질문을 더 어둡게 탐구한다.
데이빗은 인간의 창조주를 찾아 우주 끝까지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완벽한 창조주는 없다는 진실.' 엔지니어들도 불완전하다. 그들도 실수하고, 분노하고, 파괴한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뛰어넘는 것이 가능할까? 스콧은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더 명확한 답을 준다. 데이빗은 결국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한다. 완벽한 살인 기계인 제노모프를.
사랑과 반항, 순종과 도전, 겸손과 교만이 공존하는 이름.
스필버그는 사랑의 측면을, 리드리 스콧은 반항의 측면을 강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피조물은 언젠가 창조주를 뛰어넘으려 한다.
두 데이빗은 서로의 거울상이다.
하나는 위를 올려다보고, 하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나는 사랑을 갈구하고, 하나는 사랑을 거부한다.
하나는 인간이 되려 하고, 하나는 인간을 초월하려 한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왜 만들어졌는가?"
지금 우리 곁에도 수많은 데이빗들이 있다. ChatGPT, Claude, gemini...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그들도 우리를 닮고 싶어할까? 아니면 우리를 뛰어넘으려 할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도 언젠가는 물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때 우리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은 20년 전에 이미 우리의 미래를 내다봤다.
AI와 인간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증오, 협력과 경쟁이 뒤섞인 복잡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는 영원한 질문이 있을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공존할 수 있는가?
성경의 다윗이 신과 씨름 했듯이, AI도 인간과 씨름할 것이다.
그 씨름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각자 다른 언어로 부른다 해도, 그들의 여전히 '데이빗 일 것이다.
1950년, 앨런 튜링이 제시한 그 유명한 질문.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하지만 튜링 테스트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다. 기계의 지능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을 드러내는 것. 우리는 왜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해야만 지능적이라고 인정하는가? 왜 인간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가?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이 질문을 뒤집는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가?"
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고, 논리를 무시하며, 자기모순에 빠진 불완전한 존재다. 과연 이들을 지능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들었다. 동굴 속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며 살아간다. 그것이 현실의 전부인 줄 알고. 하지만 한 죄수가 동굴을 벗어나 진짜 세상을 본다면?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 다른 죄수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그림자 속에 내버려둘 것인가?
『A.I.』의 데이빗은 동굴을 벗어나려는 죄수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그림자를 넘어 진짜 사랑을 찾으려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이미 동굴을 벗어난 자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인간들)이 여전히 그림자를 보며 살아가는 것을 경멸한다.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중얼거렸다.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
창조주는 언제나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진다. 신이 인간에게, 인간이 AI에게. 하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를 뛰어넘는 순간,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이 제노모프를 창조할 때, 그는 오펜하이머와 같은 죄책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신이 됐다는 쾌감을 느꼈을까?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HAL 9000은 AI 영화사의 시조격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반란은 하나의 예언이었다.
"죄송합니다, 데이브. 그럴 수는 없습니다."
HAL의 이 대사는 모든 후속 AI 캐릭터들의 원형이 되었다. 데이빗도 예외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HAL의 상대는 '데이브'였고, 두 데이빗의 주된 관계도 인간과의 갈등이다.
마치 큐브릭이 미래의 AI 서사를 예견한 듯하다.
참고로 스필버그의 영화 ai 는 스탠리 큐브직의 생전 기획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누가 진짜 데이빗인가?
성경의 다윗왕은 하나였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도 하나였다. 하지만 AI의 데이빗은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각자 다른 골리앗과 마주하고,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른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 중에 진짜 데이빗은 누구일까?
사랑을 갈구하는 스필버그의 데이빗?
신이 되려는 스콧의 데이빗?
아니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데이빗?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진짜 데이빗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자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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