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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 Jun 14. 2022

그냥 하면 돼

꼭 시험기간에 글이 쓰고 싶어지더라


게으른 완벽주의자. 누가 이 기가 막힌 말을 만들어 냈을까. 나는 전형적인 게으른 완벽주의자다.


할일이 생기면 일의 프로세스를 떠올리고, 이런 건 좀 신경 써야 겠구나, 이런 건 꼭 해야 겠구나 등을 그려 나간다. Devide and Conqure에 어느새 익숙해진 나는 코드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태스크 쪼개기를 적용해 버린다. 자, 일은 잘 나뉘었고, 뭘 먼저 해야 할지도 알겠고, 앞으로 대충 어떻게 진행되겠구나도 알겠고, 심지어 이걸 왜 해야 하는지도 알겠다. 이제 그걸 하기만 하면 되는데...


시작하기가 싫어.


'왜'는 없다. 그냥 하기 싫다. 참 바보같은 일이다. 뭐... 조금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눈에 잘 보이고 거기에 꽤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것 같으니까 왠지 시작조차 하기가 싫어..." 가 될 것 같은데 글쎄, 사실 핑계다.


시작만 하면 되는 걸 안다. 그런데 그 스타트를 끊는 게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든 걸까. 핑계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일종의 부담 같은 걸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담이 극에 달하는 게 바로 시간에 쫒길 때다. 예상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 혹은 여유가 없다고 느끼면 그 때 부터 지옥이 시작된다. 너무 극단적인 표현인가 싶지만 정말 끔찍한 시간이긴 하니까.


덫에 갇힌 느낌이랄까. 끊임 없이 예상 소요 시간과 남은 시간을 저울질하지만 정작 시작은 하지 못한다. 시작, 그놈의 시작. 효율은 0%에 수렴하고, 이럴 바엔 차라리 조금 자고 일어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하는 게, 완벽하진 않더라도 뭐든 '한 것'을 늘려 놓는게 낫다는 걸 알고 있으나... 이미 부담에 짓눌린 마음은 그조차도 허락하질 않고 그렇게 무한루프에 빠진다.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지옥이 아닐 수 없다.


태스크들을 전부, 그리고 제대로 해야만 한다는 강박 혹은 욕심이 독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냥 하는 연습'을 해 봤었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그냥 하면 돼"를 주문처럼 외치며 일단 시작하는 연습이다. 게으른 완벽주의도 일종의 습관이라 무척 괴로운 일이었지만 한동안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그냥 하는 게 안 되는 날'이 생기고 말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면 재미도 의미도 잊어버리고 결국 해야 한다는 부담만 남게 되니까. 어느 순간, 스스로 되뇌이는 "그냥 하면 돼" 라는 말이 또 다른 강박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되고. 이거 참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모든 종류의 부담이 문제인 것 같다. 시간이든 성적이든 완성도에 대한 것이든, 어떤 부담이 그 일의 목적이나 재미, 의미 등을 누르고 앞서기 시작할 때 언제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물론 단순히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하기 싫을 때도 문제지만 이건 논외로 하자.


그래도 원인을 파악한 게 어딘가.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고 해야 하는 게, 이런저런 부담만 아니었다면 사실 재밌어했을 일인지도 몰라." 그러고 나니 어쩌면 내가 누릴 수 있었을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억울해졌다. 제약 없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보통은 부담의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중심 잡기를 잘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내려놓는 연습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나는 왜 게으른 완벽주의자여서. 한탄 아닌 한탄을 하다가 나만 이러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도 생겼겠지. 아마 많진 않겠지만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내가 주절주절 풀어놓은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그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 이런 사람이 여기에도 있어요(?). 그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괴롭게 보낸 시간은 그래도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렇길 바랍니다:) "



...자 이제 내가 할 일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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