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날 *쿠사리 주는데도 너는 나를 왜 싫어하질 않니?"
대학원 지도교수가 내게 물었다.
(*쿠사리: 쿠사리는 일본어다. 우리말 '핀잔'으로 써야 옳지만, 교수님이 쓰던 말 그대로 이하 쿠사리라고 쓴다.)
나는 서른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야심 찬 학문의 포부 따위는 없었다. 단지, 학부시절 교수님의 말 한마디(너는 공부해라!)때문에 인지심리 대학원에 입학해 버렸다. 대학원 특별전형으로 입학하면서 구술시험이라는 걸 봤는데 나의 지도 교수를 포함한 세 명의 시험 감독관이 나를 똥 씹은 얼굴로 내리깔아보던 낯빛을 분명히 기억한다. 심리통계에 대해 물었고, 방송국에 다니면서 왜 대학원에 오려고 하는지 심심풀이 땅콩 먹듯 대충 질문을 던졌다.
"방송 일은 신이 주신 재능이었고, 덕분에 밥벌이는 하고 삽니다. 그 세월이 6년이고, 이제 저는 밥벌이는 걱정 없으니 제가 하고 싶었던 일 중에 한 가지였던 인지심리 공부를 하고자 대학원에 지원했습니다."
오래 준비한 대답이었다. 교수들은 나의 대답에 다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런 미친...'의 표정과 속엣말이 다 보이고 들렸다.
여하튼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공부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재밌어서 괴로웠다. 이 재밌는 걸 풀타임으로 공부만 하는 대학원생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방송국에 가야 하는 그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슬리퍼 슥슥 끌며 전공방을 향하는 풀타임 대학원생들의 뒤통수가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당시 다른 전공 지도 교수들은 으레 전공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을 떠맡기곤 했지만, 나의 전공 지도 교수는 내게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다. 실은 안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일을 하고 있어서 못 시킨 게 맞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딱 한번 실험 샘플 코딩 작업을 시키셨다. 지금 와서 고백건대, 나는 교수님이 내게 딱 한 번 시킨 그 일조차 실은 내 손으로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전공 방 이름인 인지 및 지각 실험실에는 미국에서 갓 박사를 마치고 온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선생님은 매일 실험실에 나와 IBM 노트북 한 대를 끼고 해외 논문들을 보거나 자신의 논문을 작성했다. 나는 뻔뻔하게 이 선생님에게 코딩 작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라고 쓰고, 시켰다라고 읽는다). 이유는, 나는 시간이 없는데 이 코딩 작업하려면 1박 2일 걸린다, 그런데 선생님은 현재 시간도 많고, 이런 코딩 작업 1~2시간이면 끝난다. 그러니 선생님이 도와달라. 선생님은 기가 막혀했고, 교수님 알면 큰 일(통역하자면, 쿠사리를 아주 크게 맞을 일)난다며 두 눈을 치켜떴다.
"네. 혼자 해볼게요. 죄송합니다." 무리한 부탁인 거 나도 안다. 너무 막막해서 그냥 한 번 말이라도 해본 것뿐이었다.
그리고 1시간 동안 아주 멍청하게 코딩 작업을 했다. 선생님은 흘깃흘깃 내 노트북 모니터를 훔쳐보고 있었다. 2시간째가 될 무렵 선생님이 말했다.
"교수님한테 진짜 말하면 안 돼.(역시나 쿠사리를 맞을 것이기에)" 그러더니 코딩 작업을 척척하기 시작한다.
"바쁘면 가봐. 다 되면 이메일 보낼게."
다음 날, 선생님이 보내준 메일을 열어 완성된 코딩작업본을 그대로 교수님께 보냈다. 확인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 설령 확인한다고 내가 뭘 고치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교수님은 그때 나에게 진짜 일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테스트를 했다는 거 나도 안다. 논문 실험의 기본인 표본 코딩작업을 어떡하는지 보려고 말이다. 근데 나는 이런 만행(쿠사리를 맞아도 된통 맞아야 할)을 저질렀다.
코딩 작업 테스트는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고, 교수님은 온갖 방법으로 나를 테스트했다. 그 테스트의 시작과 끝은 늘 쿠사리였다.
교수님은 천재였는데, 교수가 되기에는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가르침 보다 본인의 연구가 늘 제일 재밌고 우선인 분이었다. 가르치는 일보다는 그러니, 혼자 연구를 하는 일을 했더라면 천재적인 재능을 더 잘 썼을 것이다. 아는 것은 많지만, 학생들에게 아는 것을 가르치기보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걸 모른다고 쿠사리를 주는 게 교수님의 특기였다. 죄송하지만, 아주 재수 없는 스타일... 그러니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교수들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다. 늘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 읽고, 논문 쓰고... 그 생활을 즐기셨다. 그러다 강의 시간이 되어 강의실에 들어오면, 교수님은 그 순간부터 언짢아졌다. 늘 학생들에게 쿠사리를 줬다. 학생들은 그런 교수님을 미워하며 험담을 했다.
그런데 그런 교수님이 나는 싫지 않았다. 학부시절에도, 대학원 시절에도 여전한 성격이셨지만 대학원에 들어가 전공 지도교수가 된 교수님을 더욱 좋아했다. 서머싯 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수님은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교수님을 위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릭랜드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교수님도 알았다. 자신이 미움받는 사람이라는 거. 그래도 변하지 않고, 변할 마음도 없으셨다. 그러고 보니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닮은 면이 많다. 둘 다 천재라서 그런가. 천재도 여러 종류겠지만, 교수님은 스트릭랜드과 천재셨다.
어느 날, 교수님이 내게 물었다.
"내가 만날 쿠사리 주는데도 너는 나를 왜 싫어하질 않니?"
"훗...(훗은 코읏음이다. 진짜 코웃음이 나올법한 질문이지 않은가...)글쎄요."
교수님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쿠사리 준 벌로 영원히 궁금하라고.
교수님보다 나이 많은 대학원 박사과정 선생님에게도 굴욕적인 쿠사리를 주며, 박사과정 선생님이 이를 갈던 교수님이셨다. 박사과정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00선생은 왜 교수님이 만날 쿠사리 주는데도 교수님 욕을 안하더라."
"속으로야 백만번 하죠. 근데 교수님은 진짜 천재예요. 특이하고요. 교수님처럼 특이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되게 되게 특별하게 위대해요."
사람마다 위대함의 차이는 다를 것이다. 내게는 쿠사리 대마왕 지도교수가 위대한 인간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