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상에 갑자기 치고 들어온 밀키트에 관하여
밀키트를 떠올려 보자. 손질된 재료와 준비된 양념을 이용하여 그럴듯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키트. 머릿속에는 소분된 진공포장 재료들과 적당한 양념이 들어있는 깔끔한 플라스틱 용기 제품이 떠오른다. 이제 우리에게 밀키트는 이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포장을 까서 적혀있는 간단한 조리법대로 따라만 하면 되는 요리와 간편식 그 사이의 것. 정형화된 밀키트가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종류가 다양해진 것도, 시장의 규모가 늘어난 것도, 퀄리티가 높아진 것도 불과 몇 년 사이에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이런 밀키트를 본격적인 사업으로 접근한 곳은 스웨덴의 한 기업이 맞지만 밀키트를 최초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밀키트를 보며 자랐다. 다시 한번 잘 떠올려 보자. 손질된 재료를 양념과 섞어 먹는 것이 최근에서야 나온 개념일까?
간편하게 요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키트의 최초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스틱 용기 속 밀키트보다 오래된 사례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라면. 미리 익힌 유탕면과 손질된 건후레이크를 물에 넣고 스프라는 양념을 넣고 조리하는 것. 간편하게 조리하고 번잡스러운 과정이 필요치 않다. 지금이야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뗼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지만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되었을 당시 라면은 혁신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빠르게 조리가 가능했고 '맛'이 있는 그럴듯한 요리였다. 건강을 중요시한 현대에 와서는 과다한 섭취를 지양하지만 국내 첫 출시 당시는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훌륭한 곡기가 되어 주었고 영양분을 채울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너무 서민 친화적인 음식이 되다 보니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지만 라면의 시작은 그랬다. 모양과 형태가 다를 뿐 개념적인 측면에서 어엿한 밀키트로 인정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떠오르는 밀키트는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대형마트에 가면 그것이 눈에 들어온다. 생선 코너에 가면 토막 난 동태와 대파를 비롯한 각종 야채가 그릇에 담겨 랩에 쌓여있다. 그리고 겉에는 양념장이 랩으로 같이 감겨있다. 마트 생선 코너에서 만들어진 동태탕 세트는 영락없는 밀키트다. 라면보다 더 지금의 밀키트에 근접한 모습이다. 손질된 재료를 물에 넣고 양념장과 함께 끓이면 얼큰한 동태탕이 된다. 나는 마트에 가면 항상 그것에 눈길이 간다. 단 한 번도 구매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눈이 갔다. 진짜 저것만 넣고 끓여도 동태탕 맛이 날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간편하게 요리를 하고 싶은 소비자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라면부터 마트 동태탕과 지금의 밀키트까지. 밀키트의 시작점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비자의 그런 마음을 공략한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프렙(Prep). 준비라는 뜻의 영단어 Prepration에서 유래한 용어다. 보통 레스토랑 주방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쉽게 말하면 전처리 과정이다. 실제 조리 과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하는 행위다. 프렙은 비록 식당에서 사용하는 용어지만 가정에서 요리할 때 우리가 장을 보고 식재료를 씻고 손질해서 조리하기 전까지 만들어 놓는 과정 역시 프렙이라 할 수 있다 . 사실 요리라는 노동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이 프렙의 역할이 지대하다. 우리가 음식을 불에 가열하고 양념이나 소스를 끼얹는 조리 행위는 대부분 순식간에 이뤄진다. 우리가 요리사라는 직업을 상상할 때 주로 머릿속에 그리는 불 앞에서의 사투와 프라이팬을 휙휙 놀리는 것은 요리사의 시간에서 극히 일부다. 요리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묵묵히 재료를 준비하는데 사용한다. 그만큼 프렙은 그 시간도, 품도 많이 들어가는 작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요리를 망설이고 그것을 난도 높은 노동이라 생각하는 데는 프렙이 한 몫하리라 생각한다.
이 프렙이라는 것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그것을 망설이게 한다.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내 손으로 내가 먹을 것을 차려보고 싶은 로망이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집에서는 해 먹기 곤란한 음식이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거창한 요리 과정을 모두 수행하기는 귀찮고 집에서 요리를 해 먹고 싶기는 할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 밀키트는 모두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다. 요리를 노동에서 취미 수준으로 탈바꿈시킨 마법의 수단이 되었다. 인간은 때로 이기적이고 모순적이어서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고도 노동의 대가를 얻고 싶어 했다. 밀키트가 그 이기심과 모순을 이루게 해 주었다. 최근에 와서 거의 모든 상업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는 마성의 단어, 바로 편리함과 간편함. 밀키트는 바로 그 편리함과 간편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돈을 주고서라도 편리함과 간편함을 사고 싶어 했고 불편함을 극도로 싫어하는 시대에 참으로 알맞은 제품이다.
나는 자취생이고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집에서 이것저것 만들어 먹고 그것을 즐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1인 가구에게 요리라는 것은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으나 맘처럼 쉽지 않고, 시도하자니 너무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숙제나 다름없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만해도 자취생으로써 요리를 하는데 애로 사항이 많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프렙의 번거로움이고 두 번째는 1인 가구에게는 너무 양이 많게 포장된 식재료다. 첫 번째는 앞에서 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는 그야말로 1인 가구에게는 곤욕스러운 일이다. 물론 시장에는 1인 가구를 저격한 소분된 식재료들이 많이들 나왔지만 사실 그만큼 비싸고 종류가 적다. 언젠가 부추전이 먹고 싶어서 부추를 샀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먹을 만큼의 부추전을 만들고도 너무 많은 부추가 남아서 유튜브에서 부추를 활용한 온갖 요리를 전부 찾아서 해 먹었다. 부추가 시들기 전에 재빨리 해먹었던 탓에 한동안 부추에는 손도 안갈만큼 질렸었다. 그리고 이 곤란함을 밀키트는 해결해줄 능력이 된다.
그렇다고 1인 가구만 밀키트를 사 먹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형마트에서 팔던 동태탕 밀키트는 주부들을 저격한 것이었다. 그것만 봐도 밀키트는 주부들에게도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다. 집에서 해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밀키트로 많이 출시되고 있다. 해물찜이나 낙곱새 같은 것들. 맘먹고 하면 하겠지만 그 맘을 굳이 먹고 싶지 않을 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부족하면 재료를 기호에 맞게 추가하면 된다. 밀키트가 요리의 베이스가 되어준다. 중심을 잡아줄 맛과 재료가 준비되었다는 것만으로 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게다가 선택지가 적었던 초기 밀키트에 비해 온갖 음식들이 밀키트로 쏟아지듯 출시되었다. 유명 음식점의 음식과 셰프들의 시그니처 메뉴들부터 대기업 제품들까지. 선택의 다양성이 늘어날수록 밀키트에 입문하는 사람은 함께 늘어갔다. 그 사람이 자취생인지 주부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나도 밀키트를 몇 번 사 먹어 봤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밀키트였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몸소 경험해본 결과 장점이 많은 제품군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단점도 뚜렷한 법이었다. 장점은 앞서 말한 것 그대로였다. 편리함과 보장된 맛. 하지만 내가 체감한 단점 역시 명확했다. 아무리 냉장 보관을 해도 조리와 가공이 되지 않는 식재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선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불운한 탓이었는지 내가 사 먹었던 밀키트들은 채소가 하나같이 숨이 죽어있었다. 조금은 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물론 가열하기 때문에 조리한 후에는 큰 상관이 없지만 아무래도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신선 식품이 적게 들어가는 제품에 더 손이 갔고 현시점, 이것이 밀키트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품도 빈약했다. 포장된 재료만 사용하면 기대하는 것보다는 그 모습이 초라해진다. 가격과 품질의 타협점임을 감안해도 아쉬웠다. 맛도 대단하지 않았다. HMR과 같은 간편식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긴 하지만 여전히 가공품이라는 느낌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을 감안했음에도 아쉬운 것은 사실이니까.
내가 밀키트의 충성 고객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는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내가 먹어본 것은 특정 브랜드의 몇 개의 제품에만 불과했고 시간이 지났기에 밀키트는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상은 편리함 딱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쉽게 나만의 요리를 완성할 수 있지만 딱 거기서 멈췄다. 편리함을 돈 주고 구매한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메리트를 느끼지 못했다. 굳이 더 꼽자면 자취생이 도저히 혼자 해 먹을 수 없는 낙곱새, 곱도리탕 같은 것을 맛볼 수 있다는 것 정도. 결국 나는 여행과 같은 특별한 날이나 요리가 정말 귀찮을 때 말고는 찾아서 구매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감상이니까. 밀키트의 장점이 더 와닿은 소비자에게는 아주 훌륭한 제품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조건이 붙긴 했지만 재구매의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나도 어느 정도 설득됐다고 할 수 있겠다.
1인 가구의 증가와 편리함을 돈 주고 구매하는 편리미엄, 밀키트의 성공은 단순히 이 두 가지 때문이었을까. 앞서 말했지만 밀키트는 그 형태만 달랐을 뿐 그 개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밀키트 제품의 성공에는 꼬리에 꼬리는 무는 요인들이 있었다. 1인 가구의 증가는 말할 것도 없다. 더하여 코로나19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외식보다는 내식 인구가 늘면서 요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펜데믹이라는 유래 없는 상황에 놓인 1인 가구들은 직접 요리가 하고 싶었고 그 선택지로 밀키트를 골랐다. 이전부터 이어진 외식의 프리미엄과 편리미엄은 재료를 직접 사는 것보다 비싼 밀키트일지라도 맛과 편리함이 있다면 주저 없이 구매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집에만 있더라도 내가 잘, 있어 보이게 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SNS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내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SNS에 올리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손쉽게 요리를 하기 위해 밀키트가 간택되었다. 그 외에도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웰빙 열풍과 전래 없는 음식에 대한 관심, 캠핑인구 증가 등도 밀키트의 성공 요인에 한몫을 했다.
결국 주어진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밀키트가 놓여있었다. 여러 상황들의 해결책으로 밀키트가 솟아났고 꿈틀거리는 새로운 시장을 놓치지 않은 기업들이 있었다. 덕분에 밀키트 시장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고 판단되었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레스토랑과 외식 브랜드, 유명 셰프들까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밀키트를 출시했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밀키트 사업이 시작되었을 무렵에 비하면 정말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어찌 보면 요리와 간편식 사이에 놓인 애매한 포지션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시장을 잘 개척해나갔다. 사람은 적당한 일을 통해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동물이었다. 다 만들어진 간편식도 좋지만 내 손길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서 어엿한 요리를 탄생시킬 수 있는 밀키트에게도 관심이 쏟아졌다. 요리는 하고 싶지만 귀찮기는 싫으니까.
밀키트가 비약적인 성장을 거뒀다고는 하나 식품업계, 외식 업계 전체에서 보면 여전히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간편식 시장은 오래전부터 거대한 몸집을 자랑했다. 그 몸집은 지금도 커지는 중이다. 이제 코로나 19는 한창때에 비해 잦아들었다. 집 안이 답답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길 원했다. 덩달아 외식물가는 상승해서 제로 챌린지라는 무지막지한 것이 등장하기도 했다. 소비가 위축됐다. 어찌 보면 밀키트의 성장 동력이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밀키트는 지금이야 말로 증명할 때다. 한 순간 반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여행용이나 특별한 날의 이벤트성 제품이 될지, 지금의 간편식처럼 일상 속에 확실히 스며든 필수품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내 감상은 위태위태하다고 느꼈지만 자본이 투입되고 많은 이들이 도전장을 내밀면서 더 확대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 판단하기에는 섣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