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비를 강타한 친환경
내 세대라면 분명히 교과서에서 지구온난화라는 단어를 질리게 보아왔으리라 자신한다. 지구온난화라는 글자를 교과서에서 볼 때는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북극의 얼음이 빠르게 녹고 이상 기후가 나타난다지만 사실 피부로 체감되지는 않았다. 저 멀리 남태평양의 한 섬이 바다에 잠긴다지만 내가 본 것은 글과 그림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 끔찍이 더운 여름, 사라지는 봄과 가을. 비가 오지 않고 원래 알던 계절이 아니었다. '지구가 아파요'라는 슬로건이 이토록 절실히 와닿는 순간은 이제껏 없었다. 나의 부모님 세대에서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나 수 세기가 지난 미래의 일이라 취급받았다. 엄마는 아직도 종종 말한다.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시대가 왔다니. 이것처럼 환경오염에 따른 비용인 환경비용도 내 세대에게는 부모님 세대의 유료 생수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환경오염에 대한 비용을 내는 시대가 왔다니. 우리의 일상에 환경을 위한 돈이 부과되기 시작했고 삼시세끼 먹는 밥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탁에 오르는 것 중에 현대 과학의 산물이 나닌 것이 없다. 그 말은 즉슨 인간의 손을 지나치게 탔고 결국 우리의 섭취 행위는 우리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소리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추적해나가면 우리가 음식을 먹는 모든 과정들이 얼핏 지구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르고, 수확하고, 조리하고, 먹어치우는 과정이 지구에게 해가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수의 취향이었던 채식주의가 유행하고,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금지했다. 거대한 듯 거대하지 않고,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변화들이 등장했다. 그린(Green)은 어디에 갖다 붙여도 잘 통하는 단어다. 이 녹색이라는 단어가 물건 앞에 붙으면 왜인지 몸에 건강하고 환경에 이바지하는 것 같다. 유기농이라던지, 무농약 식재료들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비싸지만 잘 팔리니까. 하지만 과거의 이런 소비는 사실 지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건강을 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웰빙 트렌드가 무섭게 유행하면서 이런 결과를 불렀다. 웰-빙의 개념이 나 자신에게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다르다. 웰-빙이 우리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되었다. 내 몸도 챙기지만 지구 환경 전체를 챙기는 소비가 생겼다. 물론 기업들은 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제품의 무게를 우리 몸에서 지구로 옮겨 갔을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먹힌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들이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먹을 때조차, 혹은 먹을 때만큼은 지구의 안녕을 묻기로 한 소비자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가볍고, 튼튼하며, 방수가 되고 싸다. 플라스틱과 비닐은 이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 플라스틱과 비닐이 개발되면서 유통 업계는 혁신을 맞이했다. 플라스틱은 음식을 담아도 상태에 영향을 주지 않고 투명한 재질 덕분에 음식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열을 가해서 손쉽게 성형하여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비닐은 플라스틱에 비해 더 유동적이고 더 가볍다. 모양이 없는 대신 부피가 작고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 플라스틱과 비닐은 마치 신이 유통, 특히 음식 유통에 사용하라고 내려준 물질 같다. 덕분에 우리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도시락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집에 온다. 따로 꼼꼼한 설거지가 필요하지 않고 그대로 분리수거해서 버리면 끝이다. 소비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이만한 수단이 없다. 하지만 신도 간과하지 못한 것. 아주아주 편리하지만 너무너무 썩지 않아서 지구가 골머리를 앓는 것. 지구인들이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을 배출하지만 처리하는 속도가 배출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플라스틱과 비닐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역행을 한다. 음식을 담는 포장마저도 지구에 유해한 요즘이다.
스타벅스가 종이 빨대를 제공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한다. 어딜 가나 쾌적하고 늘 일정한 맛의 음료를 제공한다. 매력적인 MD상품이 있고 눈길이 가는 이벤트도 많이 진행한다. 하지만 딱 하나. 그 종이 빨대 하나 때문에 스타벅스가 원망스럽다. 음료에 잠시 넣어두면 잔뜩 불어서 못쓰고, 특유의 향과 맛 때문에 음료 맛을 망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카페 내부에서는 일회용품 사용이 금지된다. 카페뿐만 아니라 마트나 편의점에서도. 플라스틱과 비닐이 유해한 이유는 일회용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 사용되고 버려지기에 치명적인 것이다. 배달 업계가 성장하면서 플라스틱 사용이 더 늘었고 이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돌아왔다. 결국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일회용품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었고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빗발쳤다. 법적으로 규제하고, 정책을 펼쳐서 사용량을 줄이며, 기업들이 이를 역으로 마케팅 소재로 이용했다. 소비자들은 이런 일회용품 사용량 줄이기에 대해 불편을 토로하면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에 대체로 수긍했다. 이제 플라스틱 사용에 아주 조금씩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먹을 것에 예민하고 그 음식이 바뀌면 금방 알아차린다. 환경 변화는 우리의 식탁을 뒤바꾼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한국 명태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것이 되었다. 국민 생선 명태는 한류성 어종이고 한국 바다의 수온이 올라가면서 점차 근해에서 잡히지 않았다. 수십 가지의 이름을 가질 만큼 국민에게 친숙한 생선이었던 명태는 이제 원양어선으로 잡아온다. 국민 생선이 국산이 아닌 아이러니함. 명태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는 식재료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식탁이 변하고 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식탁이 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한식은 한국에서 길러진 식재료로 만들어야 제맛을 낸다. 식재료의 변화는 한식을, 그리고 식탁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자아낸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식재료를 지키려면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변해야 한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이 적어도 악당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비건. 현재 국내에서 꾸준히 성장 중인 외식 트렌드다. 이 비건이 떠오른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환경 보호도 그중 하나다. 비건에 관심을 가지는 20~30대가 오직 환경보호를 위해 채식주의를 선택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이 다이어트와 건강을 위해서다. 하지만 환경 보호라는 이유도 그들이 육식주의에서 채식주의로 전향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김에 겸사겸사 지구도 지키면 좋은 것이지 않은가. 심지어 그 채식마저도 일반적인 채소가 아니라 무농약, 유기농으로 길러진 친환경 채소를 찾는 소비자들도 많아졌다. 비건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챙기면서 환경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육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많다. 소에게서 나오는 메탄이 온실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전래동화처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물론 그것 말고도 공장식 축산이 인간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확실히 부정적이다. 환경적인 효율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공장식 축산은 영 꽝이고 오롯이 우리의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의 육식의 부정적인 단면을 모두 알면서도 고기를 끊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덜 먹는 사람이 늘었다. 선택적인 채식주의자들이 생겼다.
'공정거래'라는 말이 소소한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커피와 카카오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치른 커피와 카카오에 붙는 단어였다. 당연히 일반 제품보다 비쌌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정거래라는 마성의 단어에 지갑을 열었다. 10~20년 전에 공정거래라는 단어를 붙이고 가격을 비싸게 받았다면 장사꾼의 상술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을 노릇이다. 대동강 물을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은 오래도록 사기꾼의 대명사로 자리 잡아왔지만 결국 우리는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소비 관습도 변하는 법이다. 그리고 공정거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양심과 도덕을 구매하는 사회가 됐다. 직접 산지로 날아가 공정한 거래를 하기에는, 직접 환경보호에 앞장서기에는 우리가 너무 바쁘다. 돈을 더 얹어주면서 타인이 발생시킨 양심과 도덕을 내 것으로 만든다. 기업은 대단히 머리가 좋고 이윤에 밝은 집단이다. 귀신 같이 시장을 읽어내고 무엇이 돈이 되는지 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그들은 물건을 판매함과 동시에 환경 보호에 이바지한다.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눈앞의 수익이 하락하고,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종국에는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친환경 마케팅이고, 그린 마케팅이다. 우리가 이만큼 수고했다는 것을, 지구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자랑하는 것.
맛은 주관적이고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마트에서 친환경, 무농약 채소들을 사 먹어보면 일반 채소와 큰 차이를 느끼기 힘들다. 심지어 과일 같은 경우는 성장촉진제와 당도조절제, 각종 비료들을 듬뿍 뿌린 것이 훨씬 더 달고 맛있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친환경이라는 단어에 혹한다. 더 비싸고 심지어 맛도 큰 차이가 없는 걸 알지만 상관없다. 채식 관련 제품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환경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매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구매를 독촉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된다. 과거에는 구매 요인 축에도 들지 못했던 것이 당당히 한 자리를 꿰찼다. 그것을 본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마케팅했다. 우리가 환경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꽁꽁 숨기는 기업은 없다. 하나라도 더 소비자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마케팅 요소가 되고 브랜드 이미지 상승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에 대놓고 자랑한다. 이런 자랑에 소비자들은 넘어가고 친환경 소비가 더 많이 이뤄진다. 자본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지만 어쨌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그것이면 뭐 됐다.
우린 어린 시절에는 교과서를 통해, 다 커서는 피부를 통해 이 지구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음을 배웠다. 이런 직접적인 영향은 우리의 경각심을 고조시켰다. 우리가 기어코 행동하게 만들었고 산업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단순히 한 명이 일으킨 행동이 아니라 소비자 전체가 태동한 덕분이었다. 종이빨대의 불편함을 호소하고, 비싼 친환경 야채를 구매하고, 공장식 축산을 비판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시작점에 있다. 이러한 소비의 결과는 지구의 상태가 호전시켰다기보다는 악화되는 속도를 늦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파괴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예측들도 수두룩하다. 우리가 환경 프리미엄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여러 불편을 감수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분리수거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우리의 행동 양식과 의식은 아직 코 앞에 머물러 있는데 지구가 망가져가는 속도는 이미 저만치 가 있다. 그것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현대의 편리함은 지구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편리함에 절여졌고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비용을 지불하게 하고, 불안감을 조성해도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렸을 때부터 비닐봉지에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비료를 잔뜩 먹은 채소를 담았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양식을 파괴하는 것은 여간 쉬운 것이 아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대에 걸쳐 이뤄져야 할지도 모른다.
지구인 전체가 지구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세다. 어쩌면 전지구적으로 미래에 가장 촉망받을 외식 트렌드는 다름 아닌 친환경, 녹색일지도 모른다. 그 변화가 너무 거대하고 산업 전체가 천천히 움직여서 그렇지 년 단위로 끊어서 외식 시장을 바라보면 결국 우리는 지구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걸어 나가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구와 우리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쫓아가고 있다. 당장 녹색 마케팅이 기업들에게 수익을 안겨주고 있는 것부터 모든 것을 증명한다. 소수의 정치인들이 정책을 만들고 강제로 친환경을 강요하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기적으로 우리의 자식, 자식의 자식은 이런 소비에 불편을 적게 느낄 것이고 세기에 걸친 전지구적 녹색 프로젝트는 성공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이 지구가 버텨준다면.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우리가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시작되었다. 비닐봉지 대신, 종이봉투를 쓴다. 일회용 플라스틱 대신에 재사용 용기를 쓴다. 과한 육식보다 채식의 비중이 늘어난다. 이것들이 모두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다. 당장 내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이미 발자국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