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식품 산업의 뜨거운 감자였던 민트초코
민트초코를 처음 먹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 갔던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먹어봤겠지. 민트초코를 처음 먹은 이래로 나는 민트초코를 좋아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민트초코가 맛있었다. 첫 입을 먹으면 개운하게 퍼지는 민트향과 그 뒤에 진하게 찾아오는 초콜릿이 좋았다. 아이스크림으로 먹으면 시원함이 두 배가 되었기에 배스킨라빈스에 가서도 나는 꼭 민트초코 맛을 담았다. 다른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가서도 민트초코가 있으면 꼭 한 번 맛을 봤다.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일반 제품에서도 민트초코 맛을 종종 찾아서 먹었다. 나는 민초단이다. 하지만 어디 가서 민트초코 좋아한다고 말하면 모두가 내 말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치약 맛이 난다면서 난색을 표하면서 그럴 거면 치약을 먹어라는 사람, 그 맛에 민트초코를 먹는다는 사람, 그냥 적당히 먹을 만 한데 그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람까지 아주 다양한 의견들이 난립한다. 도저히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결국 대화는 난장판으로 흐르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면서 복잡하고 어지러워진다.
국내에서 민트초코의 대명사하면 배스킨라빈스의 민트초코였다. 배스킨라빈스의 민트초코 외에도 민트와 초코를 결합한 디저트들은 있었다. 하지만 민초 논쟁이 가장 격렬해지는 것은 종류별로 아이스크림을 골라 담을 수 있는 배스킨라빈스에 방문했을 때다. 그래서 민트를 좋아하니, 싫어하니에 대한 사람들 사이에 소소한 논쟁은 배스킨라빈스에 국한되어 있을 뿐 전 국민이 열을 올리는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새 민초와 반민초에 대한 대결 구도가 성립되더니 MBTI처럼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중도파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모두 극단적인 민초파 아니면 반민초파였다. 그리고 그런 열띤 논쟁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즐거웠다. 무겁고, 불편한 주제가 아니라 가볍고 모두가 웃으며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민초파의 식욕과 반민초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온갖 민초 제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내렸다. 물론 걔중에는 사태가 과열되면서 민초파가 봐도 손사래를 치며 도망갈 제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도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봤다. 식품산업 전체가 민트초코 열풍에 편승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만큼 극단적이고 범국민적인 밈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민트초코는 해외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호인 사람들은 상쾌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초콜릿 맛을 선호하고 불호인 사람들은 당최 치약맛이 나는 음식을 왜 먹느냐인 반응이다. 이 치약이 결국 쟁점이다. 우리가 현대에 사용하는 치약은 대부분 상쾌함과 특유의 화함을 지닌다. 그것은 민트(박하) 성분이 한몫한다. 민트라는 향신료가 지닌 효능과 향은 치약에 아주 잘 어울린다. 우리는 치약을 입에 넣기는 하지만 그것을 삼키지 않는다. 보통은 뱉어낸다. 그리고 민트향, 그러니까 치약향은 입안의 것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맛도 맛이지만 화학 작용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결국 우리는 치약을 먹어서는 안 될 약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고 민트초코를 불호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민트를 먹으면 치약이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럽고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민트향이 워낙 강해서 초콜릿과 만나면 입안에서 민트향과 초코향 밖에 나지 않는다.
해외에서도 호불호는 갈리지만 왜 유독 한국에서는 극호와 극불호가 많을까. 민트초코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은 디저트다. 공식적으로는 197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민초의 시초라고 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다 '공식적인 것'일뿐이다. 몇 백 년 전부터 카카오의 쓴 맛을 감추기 위해 민트가 사용되었고 유럽의 기록들을 살펴봐도 민트초코는 차가운 디저트의 형태로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카카오는 고사하고 민트(박하)도 많이 먹지 않았다. 한의학에서 약재로는 사용하나 그것을 활용한 요리는 많지 않았다. 워낙에 독특하고 화한 맛 때문에 한식과는 결이 다른 식재료다. 반면 유럽에서는 민트를 활용한 디저트나 차가 발달한 덕분에 생각보다 민트를 꾸준히 섭취해 왔다. 민트 DNA가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내에 상륙한 민트초코는 사람들마다 판이한 기호를 가지게 했다. 카카오의 쓴맛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태초의 민트초코와는 달리 오로지 민트와 초코의 조화 덕분에 들어온 것이다. 고농도의 카카오가 함유된 초콜릿보다는 '초콜릿=단거'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굳이 민트와 초코는 섞어먹을 이유가 없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낯선 조합은 호불호를 생성시켰고 작금의 논쟁을 만들었으리라고 추측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민초의 호불호가 있더라도 이것이 하나의 외식트렌드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가볍고 재미있다. 미디어 혹은 인터넷에서 민초와 반민초의 대결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웃으며 할 수 있는 논쟁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두들 알고 있다. 민트초코의 호불호는 취향의 차이기 때문에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이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시답잖은 주제로 한 시간 넘게 떠드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정치와 경제, 혹은 민감한 주제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다들 신물이 났다. 대화하는 것만으로 불편하고 피곤한 논쟁을 굳이 편한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모두가 쉽게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음식 논쟁은 그래서 더 쉽고 편하다. 우리가 한창 탕수육 부먹/찍먹으로 논쟁한 것도 비슷한 논리다. 그때도 장난 삼아 논쟁이 과열되기는 했으나 결국 그 본질은 재미를 추구함에 있었다. 민초 논쟁이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수 있었던 것도 다들 쉽게 접하는 '음식'인 점, 누구 하나 얼굴 붉히고 피곤할 일 없는 '음식'인 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논쟁을 하다 보면 격해지고 감정이 상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국은 음식에 진심인 나라다. 민트초코를 먹어온 것은 반세기도 안되었지만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은 늘 음식에 진심이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뒤처지지 않는 한국사람들에게 음식은 곧 자존심이고 자부심이었다. 결국 이런 문화는 자신이 먹는 음식 전체에 대한 자부심으로 변모했다. 어떻게 보면 꼰대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먹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설득시키고 권장하는 모습. 요즘은 이런 모습조차도 꼰대 문화라며 장려하지 않는 추세지만 다들 마음속 한켠에는 이런 음식에 대한 에고가 그득그득 들어있다. 민초 논쟁은 이러한 한국인의 정서를 잘 자극한 것이다. 음식에 관한 논쟁은 민초 논쟁이 처음이 아니다. 찍먹vs부먹부터 해서 딱딱한 복숭아vs물렁한 복숭아, 호박고구마vs밤고구마, 파인애플피자vs반파인애플피자까지 이 글에서 다 서술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음식 논쟁이 있어왔다. 이들 대부분은 민초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으며 이제는 논란과 논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물론 외국에도 이런 음식 관련된 논쟁은 문화마다. 국가마다 존재한다. 민초는 외국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며 파인애플피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음식에 관한 논쟁이 유독 첨예하고 모두가 주목하는 사회적 현상이 된 것에는 음식에 늘 진심인 한국인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민트초코 논쟁은 누군가가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종의 '밈'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딱딱한 분위기를 녹이기 위한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 친한 친구들과의 생각 없는 이야기용으로, 술자리에서 분위기 띄우기용으로, 누군가 강제로 주입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민초논쟁을 소비했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 논쟁을 눈여겨보았다. 아이스크림과 음료, 일부 디저트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민트초코가 외식업과 식품업 전반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처음에는 나름 정상적인 범주의 민트초코 음식들이 나왔었다. 가령 민초를 취급하지 않던 카페에서 민트초코 음료를 출시한다거나, 카페나 베이커리에서 관련된 디저트를 만드는 식이었다. 식품 기업에서는 빙과류나 과자류, 초콜릿류에 민트초코를 덧입혀서 출시하는 식으로 뜨거웠던 민트초코 열풍에 동참했다. 민초 열풍 초기에는 민트초코 그 자체에 집중했던 것 같다. 민트초코 논쟁을 보면서 소비자들이 민초에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고 생각보다 민트초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시기였다. 그렇게 민초 관련 제품을 출시하면서 민초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민초단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을 끌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민트초코 트렌드의 말로를 알고 있다. 민트초코의 기원인 유럽에서도 민트초코는 디저트였다. 민트도, 초코도 대부분 디저트 용으로 쓰였고 그것을 합친 민트초코 역시 디저트가 원류다. 민트와 초코는 각각 떨어뜨려놓으면 차갑게, 혹은 뜨겁게 둘 다 어떻게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이상하게 민트와 초코를 붙여놓으면 차가운 상태의 디저트만 어울린다. 아마 민트의 화한 맛 때문이겠지. 덕분에 따듯한 민트초코는 상상도 하기 싫다. 하지만 상상도 하기 싫은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각종 디저트에 쓰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민초가 갑자기 식사류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민트초코 치킨, 떡볶이, 햄버거 등등 정상적인 음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소주와 같은 각종 주류에도 민트초코가 쓰였을 정도로 모든 음식에 민트초코가 들어갔다. 민트초코를 꽤나 좋아하고 이런 밈과 트렌드가 재밌었던 나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상 이 단계에 들어서면서 맛을 위한 음식이라기보다는 오롯이 브랜드 마케팅을 위한 것이 되었다. 소비자들은 상식을 한참 벗어나는 민초 음식의 등장에 결국 눈길을 주고야 만다. 구태여 사 먹지 않더라도 그것을 사 먹은 타인을 보면서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하게끔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인지도 상승을 노린 것이다. 그 시점에서 민트초코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가가 핵심이었다. 음식과 식품의 맛이 현대의 시장에서는 1순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시가 되었다.
'뇌절'은 적당히를 모르고 과한 것을 일컫는 신조어다. 민트초코 논쟁의 결말은 뇌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적당한 뇌절까지는 좋았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민초단으로서 다양한 민초맛 디저트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적당히 대화가 필요할 때 은근슬쩍 민초 관련 주제를 던져 어색한 분위기를 풀 때도 제격이었으니 참 여러모로 쏠쏠하게 이용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민트초코 떡볶이와 민트초코 소주가 출시되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엄하게 받는다. 올바른 젓가락질부터 다양한 식사예절을 어렸을 때 자연스레 체득하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으로 장난을 치지 말 것'이다. 아마 민초논쟁의 뇌절은 그런 교육을 받아온 우리에게 너무나도 장난처럼 느껴져서 더 많은 거부감이 든 것은 아닐까. 물론 현대에 오면서 그런 장난질은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려서 기업들의 전략이 되었지만, 그래서 음식으로 치는 장난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과하게 선을 넘은 것은 사실이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입각해서 이것을 본다면 사실 이런 장난질은 성공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나 같은 사람들 역시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민트초코 음식을 출시한 브랜드를 어찌 되었든 한 번씩 떠올리니까. 말미에 가면 음식으로써 민트초코는 대실패였더라도 마케팅으로써 민트초코는 대성공이었다.
수많은 외식트렌드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듯이 민트초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민초 논쟁자체는 꽤나 오래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회자가 되겠지만 외식과 식품 기업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던 민트초코 띄우기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졌던 것 같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시들해지면서 마지막에는 거부감을 느끼기까지 1년이 못 된 것이다. 우리가 소비할 문화가 많아지고 풍부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 역시 이 민초논쟁이 뇌절이라고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 당시에는 욕하면서도 찾아보고, 찾아먹었다. 막장드라마를 욕하면서도 찾아보는 심리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제 민트초코를 떠올릴 때마다 웰메이드 민초 아이스크림이나 음료가 아닌 장난 삼아 만들어진 민초 치킨과 떡볶이를 떠올리겠지. 한낱 유희거리로 생각했던 민초논쟁이 이렇게 진지하게 선을 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쉬운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민초지만 훗날 어떤 음식이 이 장난의 도마에 오를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냥 장난 삼아 말했던 민초가 트렌드가 되고 온갖 음식으로 재탄생할 줄은. 즐겨왔던, 혹은 즐길 많은 식문화 중 하나가 이렇게 허망하게 소비될까 봐 벌써 아쉬워진다. 장난으로 시작해서 결국 우리가 정색을 하면서 싫어하는 일이 벌어져서, 그래서 아쉬워서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