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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Mar 10. 2023

하이볼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술집에서 하이볼이 자주 보인다

  섞어먹는 술은 소맥이 전부


  나는 하이볼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칵테일 한 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 번화가의 자그마한 이자카야 앞을 지나면서 산토리 위스키 잔에 담긴 음료 같은 것을 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 나는 소주와 맥주만 주구장창 먹었고 기껏해야 그 둘을 섞는 것이 전부였다. 한국 전통 칵테일인 소맥에 참 익숙해져 갈 무렵 소주와 맥주의 세계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다양한 술에 손이 뻗쳤고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평소에 손이 가지 않던 과실주와 각종 이벤트 주류, 입문용 증류주까지 다양한 술에 도전했었다. 하이볼도 그 도전의 일환이었다. 아마 내가 주문하지는 않았다. 하이볼을 당연하다는 듯이 시킨 일행 덕분에 먹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정확히 하이볼이 뭔지 몰랐다. 나는 하이볼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 으레 먹는 듯 행동했고 그렇게 처음 먹은 하이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위스키의 곡물 향이 코를 먼저 때리지만 그 향이 부담스럽지 않다. 탄산의 청량함과 상큼함이 눌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주가 부담스러울 때, 술이 약할 때, 위스키에 입문할 때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은 술이다. 덕택에 하이볼은 떠오르는 주류 트렌드가 되었다. 앞선 이유들로 진입 장벽이 낮은 덕분이다. 트렌드에 깨나 민감하다는 술집들은 거의 대부분 하이볼을 취급한다. 하이볼 세상이 도래했다. 



  쓰지만 달게 느껴지는 것은 없다


  국민의 술 소주. 소주는 시대를 거치면서 도수를 낮췄다. 소비자들이 더 부드럽고 깔끔한 술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고 죽는 데 사용하는 소주는 그러니까, 희석식 소주는 여전히 가벼워지길 원한다. 이는 과격한 음주 문화가 과거에 비해 지양되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에는 독주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속에는 분명 독주 몇 잔으로 깔끔하게 술자리를 매듭짓고 싶어 하는 마음도 조금 묻어있으리라.   


  우리가 술을 처음 접할 때 맡는, 술이라면 숙명처럼 품고 있는 알콜향. 오래 전에는 그 알콜향을 싫어하면 술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하지만 요즘은 절이 바뀐다. 술의 술맛을 싫어하는 이도 품어주고자 한다. 밀레니엄 근방에 유행했던 과일 소주가 그랬고, 내 세대에 유행했던 '○○에 이슬' 시리즈가 그랬다. 하이볼도 마찬가지다. 하이볼은 호불호 없이 누구나 좋아할 맛이다. 설령 술맛을 싫어하는 이라도.  


  누구 하나 기억을 없앨 때까지 먹는 술자리의 강도와 빈도가 확실히 줄고 있다. 술이 취기를 올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향유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이제 종종 받는다. 쓰디쓴 술만 술이 아니다. 주류업계에 유행했고, 유행하고, 유행할 달콤한 술도 어엿한 술이고 문화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이도 언제든 그 문화에 흡수될 권리는 있고 하이볼은 그 권리를 충실히 보장해 주는 대견한 술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사치는 작은 것뿐


  보통의 일반인이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고 가정하면 명품은 엄두도 못 낸다. 그럼에도 우린 명품을 산다. 왜냐, 사치를 부리고 싶으니까. 힘들게 번 돈을 황홀하게 쓰고 싶으니까. 그럼에도 명품이 너무 비싸다면 우리에겐 '스몰럭셔리'가 있다. 작은 돈으로 부리는 사치. 스몰럭셔리에는 음식이 제격이다. 비슷한 돈으로 엄청난 호화로움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니까.


  스몰럭셔리에 관해서는 의견차가 있지만 급부상한 트렌드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위스키는 스몰럭셔리에 참 잘 어울린다. 적당한 위스키는 명품 아이템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지만 타인과 차별점을 느끼게 하고 사치에서 오는 벅차오름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은 비슷하다. 덕분에 중장년층이 즐기는 술이었던 위스키는 전 세대가 주목하는 주류가 됐다. 평소 먹는 술과 비교하면 비싸지만 다른 사치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하니까.


  그런 점에서 하이볼은 위스키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세대에게 여전히 위스키는 중후한 이미지가 있다. 나 역시도 몇 번을 망설이다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하이볼은 이런 위스키를 가볍게 해 준다. 위스키 향이 코를 때리고 묵직한 알콜 맛이 나야 할 때 톡 쏘는 탄산으로 상큼하게 마무리 지어준다. 확실히 하이볼은 위스키 입문자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수 있다.           



  지독한 회귀본능 


  지금까지 달달한 술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섞어먹는 술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우린 꾸준히 그런 술들을 마셔왔지만 결국 소주로 회귀했다. 튜닝의 끝은 순정. 소주가 여지껏 살아남은 데는 그만한 다 이유가 있다. 유행을 탔던 수많은 술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들은 모두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하이볼은 어떻게 될까. 


  물론 주류업계에서 출시한 이벤트성 제품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기업에서 출시한 '제품'이고 하이볼은 일종의 음료 레시피니까. 주류업계보다는 외식업계에서 먼저 주목하면서 소비자들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럼에도 엄연한 주류이기 때문에 트렌드의 유지냐 사멸이냐의 기로에 예상보다 빠르게 놓일 수 있다.  


  맛있다. 맥주 대용도 되고, 홈바가 유행인 요즘 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조주 할 수 있다. 여러 장점이 있지만 하이볼은 좋은 입문용 술이라는 점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위스키 혹은 술이라는 음료에 부담 없이 입문하기에 알맞다. 설령 우리가 빠르게 소주로 회귀한다 해도 많은 이들을 술과 위스키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했으므로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하이볼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우리의 혀를 향긋하고 새콤달콤하게 적실만큼만 곁에 있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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