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굽는 삼겹살이 최고

직원이 구워준 삼겹살에 대하여

by 식작가

한국식 바비큐


K-콘텐츠가 유행하면서 많은 한류 문화가 수출되었다. 유튜브에는 이런 한류 문화에 대한 각종 영상들이 있는데 그중에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한국식 바비큐에 관한 내용이었다. 화로구이집에 간 외국인들 앞에 각종 밑반찬과 생고기가 집게, 가위와 함께 서빙된다. 그러면 외국인들은 모두들 의문점을 가진다. 이걸 내가 직접 구워 먹는다고? 여기는 식당인데 내가 구워 먹는다고?


평생을 걸쳐 나에게 고깃집은 그런 곳이었다. 주어진 생고기를 직접 맛있게 구워 먹는 곳.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의문이었다. 나는 식당에 왔는데 왜 내가 구워 먹어야 할까? 너무 당연해서 던지지 못했던 질문. 외국의 식당들은 모두 조리되어 그러니까 구워져 나온다. 바비큐의 형태이든, 스테이크의 형태든 조리는 모두 끝났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기에 이 질문은 상당히 유효한 질문이 되었다.


최근에 갔던 삼겹살 집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직접 구워 먹었던 곳이 반, 직원이 구워줬던 곳이 반이었다. 전에 비해 고기를 구워주는 곳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능동적으로 고기를 굽는 노동을 하지 않고 누군가 구워준 고기를 피동적으로 받아먹는 곳이 참 많아졌다. 남이 잘 구워준 삼겹살만큼 술술 들어가는 게 또 없다. 이렇게 한국식 바비큐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 중에 있다.



고기 잘 굽는 사람


아무리 맛있는 고기도 홀랑 태워 먹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만큼 굽는 이의 능력이 고기맛을 크게 좌우한다. 식당에서 좋은 고기를 내놓아도 손님이 태워 먹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태워 먹은 손님은 뻔뻔스럽게 그 식당을 맛없는 가게로 생각할 것이다. 태워먹은 것은 자신이지만 결국 탄 고기를 먹은 장소는 그 식당이니까.


그래서 맛의 편차가 존재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보통 고급의 화로구이집에서 그 필요가 절실했다. 특히 소고기를 파는 곳에서 그랬다. 비싼 고깃값을 내고 맛없게 구워 먹으면 안 되니까. 점원이 직접 고기를 구워줬다. 고기굽기에서 오는 편차를 줄여야만 한 것이다. 돈 값을 해야만 했다. 굽기라는 과정의 조력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격대가 있는 고깃집에서 이뤄졌던 서비스다. 서민의 삼겹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프리미엄을 표방하고 삼겹살 자체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삼겹살도 점원이 구워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고기가 되었다. 더 맛있게, 더 극진히 모셔야 하는 고기가 된 것이다. 삼겹살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숙성육이 유행하면서 삼겹살도 숙성시켰다. 당연히 가격은 비싸졌다. 각종 특수부위가 유행하고 다양한 형태의 고기가 등장했다. 이런 고기를 일반 삼겹살처럼 대충 구워, 대충 먹을 수는 없었다. 비싸고 맛있는 고기였기에 굽는 것도 '잘' 구워야 했다. 게다가 달라진 가격에 대한 괴리감을 극진하고 풍성한 서비스로 메꿔야 했다. 전문적으로 고기를 잘 구워주는 직원의 필요했다.



누군가 고기를 구워준다는 것,

내가 대접받는다는 것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은 누구인가? 요즘에는 그냥 잘 굽는 사람이 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기는 막내가 굽는 것이었다. 막내들은 고기를 태우지 않고 맛있게 굽기 위해 진땀을 뺐다. 그런 막내들의 피와 땀이 들어간 고기를 테이블의 연장자들은 맛있게 받아먹었다. 막내가 연장자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누군가 고기를 구워주는 것은 자신이 대접받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 수고스럽고, 번거로운 과정을 누가 대신 해주는 것만으로 최고의 서비스일 수 있다. 어쩌면 오마카세 인기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고기를 대신 구워준다는 편리함을 넘어서는 황홀한 경험. 편리함을 넘어선 극진함.


비싸고 품질 좋은 고기를 그냥 내어주는 것보다 직원이 굽도록 하는 것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심한 경우에는 마치 손님을 방치한다는 느낌을 주는 기존의 고깃집보다 더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구시대적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를 쓰는, 그래서 서비스 방식도 손쉽게 탈바꿈하는 요즘 세상에 고기 구워주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일까. 다 전략이고 전술이다.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하지만 이것이 한국의 정서에 맞는지는 모르겠다. 외식 트렌드의 흐름에 맞게 변한 것은 맞지만 사실 나는 어색하기만 하다. 실력 좋은 점원이 구워주는 것은 확실히 편하다, 맛도 좋고. 하지만 점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그 순간, 말문이 막힌다. 왁자지껄한 고깃집에서 딱 그 순간 조용해진다. 이것은 나도, 나와 함께 온 일행도, 다른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살짝 답답하다. 먹는 속도를 내가 맞출 수 없는 느낌.


삼겹살은 명실상부한 서민의 고기였다. 값싸게, 맛있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는 삼겹살만 한 것이 없다. 하지만 프리미엄을 지향하고, 누운가의 손을 빌려 구워지면서 어딘가 근엄하고 진지해졌다. 정갈하고 단정한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삼겹살과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간 먹어온 삼겹살이 맞는지 모르겠다. 맛과 별개로 아예 다른 업종이라고 느껴진다.


한국식 고깃집에서, 잃어버린 조리라는 과정을 찾아가는 시도는 좋다고 생각한다. 치솟는 물가와 원재료 값을 그저 지켜보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로 그 공백을 메우는 역시 좋다. 새로운 업종이 추가되어 외식의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것만 같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낯설고 불편하다. 삼겹살이 왜 한국에서 인기가 있나를 돌아보면 비단 맛 때문만은 아니다. 삼겹살이 가지는 푸근함과 정겨움, 그것은 그 어떤 육류도 가지지 못한 삼겹살의 가장 강력한 무기니 말이다.


하지만 그 푸근함과 정겨움은 기본적으로 저렴한 가격에서 오는 것이었다. 삼겹살 가격 자체가 상승하면서 서민의 티를 벗고 강제로 신분이 상승당한 것도 있다. 결국 여기서 오는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기를 구워준 것도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쇄작용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나, 우리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남이 구워주는 고기를 맛있게 먹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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