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찔이가 매운 맛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법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매운 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입맛이 당긴다는 이야기. 티비 속 연예인부터 주위 친구들까지 대표적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그리고 집 나간 입맛을 돌려놓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운 것을 잘 못 먹었고 매운 것을 먹으면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속이 더부룩했고 먹을 음식도 못 먹었다. 맞다. 나는 맵찔이다. 매운맛이 곳곳에 도사리는 한국에서 정말 정말 살아가기 힘든 입맛이다. 분명 매운맛은 통증이라 했다. 나는 생각보다 고통을 잘 참는 편인데 왜 매운맛은 참지 못할까. 가끔은 이런 내 혀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조선 후기, 두 차례의 왜란이 나라를 휩쓸고 나서 한반도의 식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한국인의 매운맛, 고추가 조선에 상륙한 것이다. 이전까지 김치는 하얀 백김치뿐이었다. 조미료는 소금, 간장, 된장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고추가 들어오면서 우리네 식탁에, 김치에 빨갛게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전국적인 조미료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추는 50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라를 돌고 돌아 이 땅을 매운맛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맵찔이가 살기 힘든 나라로 만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였나, 붉닭볶음면이라고 미친 듯이 매운 라면이 등장했다고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나는 시도하지 않았다. 내가 매운 것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한계를 알고 있었다. 무모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시기가 도래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가 찾아왔고 괜한 오기와 패기로 친구들과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너무 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보잘것없는 자존심 때문에 다 먹기는 했지만 속이 너무 쓰렸다. 물과 우유를 아무리 먹어도 매운맛이 한 동안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때 확신했다. 나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맵찔이구나. 앞으로 매운 음식은 피해야겠다.
혀가 아릴 정도로 매운 음식은 불닭볶음면 이전에도 차고 넘쳤다. 닭발, 불족발, 매운 짬뽕, 매운 등갈비 등등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고 입술이 아파오는 음식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매운맛 제품이 등장하고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한 것은 불닭볶음면의 공이 혁혁하다. 라면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갔고 '불닭'은 팔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더더 매운맛 라면들이 시장에 등장했다. 경쟁업체들도 앞다퉈 매운맛의 척도인 '스코빌' 지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닭볶음면은 맵찔이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출시 당시 가장 매운 라면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기본적인 매운 음식이 되었다.
불닭볶음면 이전, 대부분의 매운 음식은 식당에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불닭과 매운 등갈비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번화가에는 이런 매운 음식점들이 즐비했었다. 하지만 그 매운 트렌드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불닭볶음면이었고 제품 중심의 매운맛 트렌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불닭의 성공을 목도한 식품기업들은 각종 매운맛 제품들을 쏟아냈다. 매운맛 라면과 제품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작 신라면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불닭볶음면 이후로는 매운맛을 겨냥한 제품이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제품들은 인스타와 특히 유튜브의 인플루언서를 통해 확산되고 하나의 챌린지가 되면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자랑했다.
원칩 챌린지라는 영상이 유튜브와 인스타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빨갛다 못해 검붉은 색을 띠는 얇고 바삭한 과자를 전부 먹으면 되는 것인데 생각보다 파급력이 컸다. 사람이 맛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매운맛으로 음식보다는 놀이의 기능을 했다. 화학작용으로 혀를 부숴놓고 위장까지 터트려버리는 이 제품을 인플루언서가 먹고 고통스러워하며 버티는 영상이 수십만의 조회수를 찍었다. 원칩 말고도 다양한 매운 음식을 먹는 영상 속 사람들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대리 만족, 혹은 경외감을 느꼈다. 그리곤 편의점으로 달려가 자신의 식욕을 자극한 매운맛 제품을 집어 들었다.
미식을 위한 소비라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위한 소비가 많았다. 챌린지 영상은 지고 못 사는 한국인들의 도전 정신을 일깨웠다. 분명 대부분의 소비자는 매워서 미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매운 것을 잘 먹어도 기괴한 수치가 말해주는 제품들은 우리가 매워서 혼절하라고 만든 것이다. 과거였다면 과한 매운맛으로 뭇매를 맞을 제품 이건만 우리의 심리를 교묘하게 꿰뚫었다. 음식에 관해서라면 호기심을 못 참는 우리. 기존 불닭볶음면보다 몇 배나 맵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매울까 하는 호기심에 기어코 제품을 집어 든다. 그리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국인으로서 가지는 맵부심. 이렇게 매운 맛 시장은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과유불급. 적당한 매운맛은 분명 내 혀를 기쁘게 하지만 정도를 넘는 매운맛은 아프게만 할 뿐이다. 한식의 매력은 다채로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재료가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면서 꽉 찬 맛을 이뤄낸다. 하지만 매운맛이 강한 음식은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린다. 혀에 아픔만을 주고 음식을 먹는 기쁨을 주지 못한다. 물론 그 아픔이 기쁨이고 매운 음식을 먹는 이유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매운맛은 아픔일 뿐이다. 지금도 매운맛 제품들은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걔 중에는 마케팅용으로 나온 일회성 제품인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시장에 어느 정도 안착한 제품들도 많다. 이대로 가다가는 매운맛에 점령당하게 생겼다.
사실 맞다. 이건 맵찔이인 내가 부리는 투정이자 핀잔이다. 한국에서 맵찔이로 산다는 건 고달픈 일이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함으로써 겪은 수많은 고초와 곤란함. 가끔 받는 배려는 고맙지만 그 배려가 미안함으로 돌아올 때가 더 많았다. 언젠가 맵찔이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순하고, 더 순한 맛의 음식이 트렌드로 자리잡지 않을까. 벌써부터 매운맛 마니아들의 원성이 들리지만 이건 나의 소망이다. 우리의 위장은 소중하니까. 내 혀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