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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punyee Feb 03. 2021

대낮의 대리운전 (공황장애와 결혼#12)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나와 평범하지 않게 변해가는 환경

다음 날이다. 해는 중천이며 12시가 거의 다 되어 간다. 어젯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지난밤에 활짝 열어놓고 잤던 현관문 만이 절박했던 나의 어제를 알아주는 것 같다. 열린 문 밖으로 간간히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인관계일 것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문득 ‘내가 누군가와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를 정말 사랑해서 나의 이런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누군가가 과연 생길까?’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오후에는 결혼 소개업체의 상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막연하지만 아마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만나러 가야 한다. 생각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냥 생각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절실히 느끼고 다. 어릴 때의 다양한 생각과 상상은 비록 그것들이 터무니없더라도 미래의 씨앗이나 밑거름이라고 잘 포장할 수 있지만 40세가 가까워진 내가 그저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얘기가 다르다. 그저 몽상가에 불과하다. 주변에서도 말은 거창하나 실천하지 못하는 부류를 많이 봐왔으며 그러한 것들이 개인적으로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모든 일은 결론을 내야 한다.




어제의 여파로 당분간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보통은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상대의 집으로 픽업하러 갔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타고 한적한 식당이나 커피숍을 다니며 두세 시간 정도 만나고 돌아오는 평범한 만남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평범한 만남조차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제 터널 안에서 그놈을 만난 후부터 터널이 두렵다. 자동차로 이동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본다. 내가 가려고 하는 도로에 터널이 있는지 중간에 맘 편히 차를 세울만한 곳이 있는지 등등 만나러 가기도 전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불과 하루 만에 당연했던 일상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 그렇다고 어제처럼 대리운전으로 이동하여 대리운전기사와 셋이 데이트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다잡고 우선은 조심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상대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길고 짧은 터널이 4~5개가량 된다. 최악이다. 그렇다고 터널을 피해 국도로 우회하여 간다면 시간은 몇 배나 길어질 것이고 그 시간을 홀로 차에서 버틸 자신은 없다. 결론은 터널을 통과해야 2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내비게이션에서 곧 터널이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온다. 터널 입구에 도착하자 터널 길이가 약 300미터가량이라는 정보가 나온다. 터널 진입구에서 터널의 진출구가 보이는 전형적인 짧은 터널이다. 긴장되기는 했지만 문제없이 지나갔다. 다음 터널도 500미터 내외의 짧은 터널로 진입과 동시에 출구가 보이는 터널이다. 마찬가지 문제없이 지나갔다. 다음 터널에 도착하자 약 1.2km가량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비교적 긴 터널이다. 터널에 진입했는데도 출구의 빛이 보이지 않자 갑자기 불안해진다. 지금 속도라면 몇 초 정도 뒤에는 출구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속도계를 보자 내가 운전하던 자동차는 시속 100킬로 남짓 달려왔던 속도가 아닌 약 50킬로미터로 급격히 줄어 있다. 터널 출구의 빛이 보이지 않으니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속도를 줄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느린 속도로 왼손으로는 핸들을 오른손으로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퍽퍽 때리면서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다. 터널을 나오자 다시 살 것 같다. 하지만 눈 앞에 또 다른 터널이 있다. 다시 터널로 들어선다. 출구가 보이는 터널이지만 방금 전의 여파로 인해 심장 박동이 다시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또다시 심장을 부여잡고 짧은 터널을 나와 갓길에 정차했다.


난 이제 불과 20~30분도 운전을 못하게 된 무능력한 사람이 됐다. 어찌어찌 이를 극복했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내 시간이 다른 사람의 시간보다 더 많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시간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해왔던 일상 속 행위의 하나하나가 당연하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오늘 만남은 연기해야 했다. 내 자신감은 이미 사라지고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약속 장소까지는 아직 터널 하나가 더 남았다. 고속도로라 유턴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설사 유턴을 하려고 해도 일단은 남은 터널 하나를 지나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 터널을 향해 조심스럽게 출발한다. 초입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역시나 출구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또 강하게 심장 박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터널의 중간으로 향할수록 입구와 출구의 빛이 모두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공포가 한계에 달한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속도를 더 높여 터널을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내 몸과 정신은 현재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났다. 이런 역경을 딛고 소위 ‘썸녀’를 만나러 가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남은 하나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나와 다시 갓길에 차를 정차했다. 기분이 너무 씁쓸하다.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평소라면 20분이면 갈 거리가 1시간이 걸렸다. 그마저 30분 정도 운전을 하면서 두 번의 휴식이 필요했고 그 휴식에는 30분이 필요했다. 헛웃음만 나온다.

이때부터 어디를 이동하든 원래 예상시간보다 훨씬 빨리 출발하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 어떻게 이런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염려에서였다. 예를 들어 목적지까지 1시간이 걸린다면 2시간 전에 출발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차에 태웠다. 비교적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울 법도 했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라 그런지 반갑다는 생각보다 오늘은 차만 마시고 얼른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상대가 알고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상대가 나에게 방을 예약해 줘서 친구들과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마워한다. 감사의 선물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나오는 길에 현관에 깜빡 두고 와서 아쉽다고 한다. 이 말은 진심이 느껴진다.   


이전에 상대가 친구들과 소위 1박 2일 ‘호캉스’를 계획했는데 때마침 내가 여력이 되어 서울시내의 꽤 괜찮은 호텔을 예약해줬으며 숙박비까지 대신 지불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누군가와 친해지려면 그 상대와 자주 만나면서 서서히 가까워져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이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가까워지려는 목적으로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아 내가 직접 사용하지 못할 것 같은 호텔 숙박권을 상대에게 준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만기가 되어가는 숙박권으로 호의를 베풀어서 좋고 상대는 친구들에게 ‘썸남’이 예약해 준 방이라고 말하여 약간은 어깨가 으쓱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숙박권으로는 여러 명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여기에 추가로 돈을 지불하여 꽤나 괜찮은 하프스위트룸으로 예약을 했다.


그렇게 커피숍에서 한두 시간 정도 시시콜콜한 잡담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돌아갈 때 어떻게 하지?’ 어두워지면 그 증상이 더 심해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대화는 하고 있지만 이내 다른 곳을 응시하며 멍해지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됐다. 저녁을 먹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저녁은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상대는 이미 암묵적으로 저녁을 함께 먹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차에 들어서자 상대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방금 전 커피숍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이 이내 “혹시 담배 피우셨나요?”라고 묻는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까 이곳으로 오기 전에 터널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하나 태웠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민감한 사람에게는 냄새가 날 수 있다.


사실 이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상대가 했던 말이 있다. 나름 나이도 있고 여러 차례 연애도 해봤기 때문에 그동안의 경험으로 나름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은 이랬으면 하는 기준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가 비흡연자, 두 번째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나의 경우 어제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한 담배로 인해 지금은 그 기준에서 벗어났지만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난 상대의 기준에 해당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3개월 전의 일을 시작으로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의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의 그렇다는 말에 상대는 실망한 모습이 역력하다. 저녁은 암묵적인 동의하에 없던 것으로 되었고 그녀를 픽업했던 장소까지 다시 바래다주었다. 내리기 전에 상대가 한 마디 한다. “하.. 아쉽지만 우리는 여기까지네요.”




기분이 이상하다. 여기 까지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상대에게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앞으로 더 이상 상대를 만나러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 들며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고작 담배 한 개비를 참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녀와 진심으로 잘해보고자 했다면 공황장애로 뒤죽박죽 된 지금의 모든 상황을 잠시 뒤로 하고 우선은 상대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맞았다. 처음부터 그 정도의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즉, 확실하지 않은 상대를 확실한 사람일 것이라고 간주하며 그럭저럭 만남을 이어왔던 것이다. 이런 만남은 나에게나 상대에게나 옳지 않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대리운전을 이용했다. 이틀 사이에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로 두 번이나 대리운전을 이용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왜 전용 기사를 고용하는지 이해가 가는 요즘이다.


집에 돌아왔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운동은 하기 싫다. 무엇인가 전환점이 없다면 당분간은 아니 계속 운동은 하기 싫을 것 같다. 그놈이 언제라도 올 것 같은 불안감이 계속 있는 한 이틀 전의 건강했던 나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곧 다가올 7월에 있을 9박 10일간의 가족여행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이때부터이다.   




-에피로그-

이 날의 만남이 마지막인 줄 알았지만 며칠 후에 그녀에게서 다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늘 픽업했던 곳에 도착하자 내 차에 타지 않은 채로 지난번 깜빡했다던 선물을 건넸다. 집에 돌아와 확인하니 조금은 고급스러운 방향제였다. 그 사람이 냄새나 향에 민감했던 사람이긴 했나 보다. 왜 굳이 얼굴을 보고 건네줬는지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의 누군가도 아닌 것 같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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