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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punyee Feb 02. 2021

현관문을 활짝 열고 자다 (공황장애와 결혼#11)

강도가 들어 나를 해한다는 두려움보다 혼자인 지금이 더 무섭다.

‘그놈’이 오고 나서 이미 30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평소 같았으면 공황 증세가 누그러졌을 만도 하지만 지금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국도를 통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까지는 불과 15킬로 미터 가량 남았다. 천천히 가다가 언제든 그놈이 오면 차를 세우고 잠시 쉬었다가 가면 될 것 같았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것들이 지금은 하나하나 치밀한 계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3개월 전 일본에서 처음으로 쓰러졌을 당시로 돌아간 것이다.




약 2~3킬로미터 남짓 운전을 했을까? 지금은 안양의 한 도로에 있다. 왕복 4차선의 비교적 한산한 도로에 신호를 받아 잠시 정차한 상태이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별안간 다시 그놈이 왔다. 마찬가지 이번에도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이번에는 앞으로 조금도 나갈 수 없다. 하필 신호대기 중의 맨 앞이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몇 미터를 나갔다가 이내 정지하기를 여러 차례. 면허를 취득하고 겁 없이 도로로 나온 초보운전이라고 해도 이보다는 더 빠를 것이다. 서서히 뒤차들의 경적소리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한다. 경적 소리만큼이나 내 심장의 박동이나 땀샘도 폭발하기 시작한다. 이미 핸들은 물수건으로 닦은 것처럼 흥건히 젖어 있다. 비상등을 켜고 다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의자를 뒤로 젖힌 상태로 한쪽 팔로는 눈을 가린 채 몸을 눕힌다. 이런 나를 나무라듯 다시 한번 울컥하며 목 아래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이때 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늘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한 시간 동안에 몇 차례나 그놈이 왔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그놈과 함께 있다. 그놈이 다가오는 패턴이 과거와는 전혀 달라 너무 혼란스럽다. 더구나 지난 3개월 동안 아무런 증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놈을 잊은 채로 매우 평화롭고 건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그놈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며 사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기는 싫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집에 돌아가서 다시 한번 오늘의 일을 복기하면서 마음을 재정비하고 싶다.  


그렇게 다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왔다. 평소 구독 중이었던 한 격투기 방송에서 새로운 영상을 업로드했나 보다. 제목을 보니 시원하게 KO승으로 끝난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놓은 영상인 것 같다. 영상을 보면 잠시나마 그놈의 존재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상을 보니 말 그대로 일격을 당한 상대 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만 모아 놓은 영상이다. 한두 명씩 쓰러지는 모습을 보던 중에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쓰러지는 모습이 실제 상황이었고 맞는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과 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전에 지하철에서 내 옆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젊은 아가씨의 모습까지 더해지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재빨리 영상을 끄고 의자를 바르게 세워 고쳐 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메스꺼움이 그놈이 올 것이라는 신호나 사인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찌 됐든 그놈을 잊기 위해 봤던 영상이 오히려 그놈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이제는 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영상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된 것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10여 킬로미터를 남겨두고 대리운전을 이용하여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3시에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로 그것도 집과 1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리운전을 부른다는 것이 평소의 나라면 납득이 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평소의 내가 아니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대낮이라 그런지 기사 배정에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다.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가 되면서 대리 기사를 부른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기 시작하려는 찰나 기사가 도착했다. 비교적 멀쩡한 나를 보던 기사는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라는 말과 함께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사실 멀쩡한 낮에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대리운전을 부른 나를 기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약간은 고민했다. 그들 입장에서야 오히려 대낮에 짧은 거리를 더구나 다시 이동하기 수월한 역 근처의 오피스텔까지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내가 이유야 어찌 됐든 고마운 손님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네, 어제 숙취 때문인지 조금 피곤하네요.”라고 말하자 최근에 나와 같은 손님이 많이 있다고 한다. 피곤하면 가까운 거리라도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현명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토록 바라던 집에 돌아왔지만 평소와 달리 산뜻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지하 헬스클럽으로 가서 운동을 했을 것이며 운동이 끝나면 곧장 2시간 정도 산책을 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3개월 동안 한 번 도 빠지지 않았던 운동을 이날 처음으로 접었다. 내가 아무리 관리한다고 해도 언제든 그놈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수차례 경험하니 무기력해진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부엌 싱크대에 놓인 두부, 토마토 등 건강을 위해 사놓은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음식들이 눈에 띈다. 헛웃음만 나온다. 저따위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 졌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담배이지만 오늘은 강렬하게 생각난다. 담배를 하나 사 왔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담배를 손에 댔을 때와 같이 조금은 떨린다. 하지만 이내 익숙하게 피워 댔고 그렇게 몇 개비나 피운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오늘부터 다시 예전의 나, 그저 그런 나로 돌아갔다.


매일 건강식을 챙기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운동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나 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 담배를 다시 몇 개비 피웠다고 해서 기분이 더 낫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학습된 무기력에 의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가장 컸다. 과거 심리학 시간에 배웠다. 전기가 흐를 수 있는 우리를 만들어 안에 원숭이를 집어넣고 바닥에 전기를 흐르게 하면 전기를 처음 맛본 원숭이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전기를 피해 뛰어다닌다. 하지만 어디로 뛰어다니든 전기는 흐른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어차피 흐르는 전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원숭이는 결국에는 전기가 흐르기 시작해도 체념하고 도망칠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마치 이 우리 안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어차피 내가 무기력한 원숭이라면 그깟 담배 하나 피웠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의 무기력한 나는 우리 안의 원숭이 만도 못하다. 인생이 ‘1’에서 출발하여 ‘100’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라고 가정하면 나는 지금 ‘-100’에 있다.  




내일은 결혼상대를 소개해주는 업체를 통해 만난 상대를 네 번째 만나는 날이다. 매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은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만났다. 아직까지는 그저 서로를 탐색하는 단계지만 앞으로 관계가 발전될 여지는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계속 만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컨디션으로 상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럽다. 즐거울 리 없다. 만나는 날짜를 연기해도 됐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관계가 지금보다 더 발전되든 아니면 이 즈음에서 끝내든 어서 결론을 짓고 싶었다. 이 결론이 후자가 되리라는 것은 이때 이미 느낌이 왔다. 누군가를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부담스럽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이다. 혼자 있으면 두렵고 그렇다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배는 고픈데 밥을 먹는 행위가 두려운 상황이다.


이날은 내 인생에서 그놈이 가장 많이 왔다. 약을 먹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으며 잠을 자려고 하면 이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고 괜찮다 싶다가도 벌떡 자리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는 상황이 이어졌다. 급기야 이런 생각까지 든다.


'긴급한 상황이 되어 내가 어렵게 119에 연락을 한다. 그 사이에 나는 의식을 잃는다. 도착한 대원들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모르니 문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내가 죽는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생각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온갖 상상을 하게 됐고 이 온갖 상상이 다시 새로운 걱정을 만들어 다시 그놈이 오는 상황이 무한 반복됐다. 결국 이날부터 나는 오피스텔의 현관문을 누구라도 들어오라는 듯이 활짝 열고 자기 시작했다. '강도가 들어 나를 해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보다 '내가 죽었는데 아무도 알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상상과 이 상상이 낳은 공포와의 싸움은 아침까지 계속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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