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에 집 근처의 개인 병원 정신과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불안이 찾아오면 언제든 걸어서라도 찾아갈 수 있도록 가능한 가까운 곳으로 택했다. 꼭 정신과까지 와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채 들어갔다.
접수를 마치고 자그마한 병원을 둘러본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 트레이닝 복장의 젊은 아가씨, 교복을 입은 여학생,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시는 할아버지 등 모두가 나와 같이 얼굴만 봐서는 전혀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모두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한 명씩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아 보인다. 약 5분에 한 명씩 진찰이 이뤄지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상황을 5분에 모두 설명하고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대학 교수의 개인 집무실처럼 꾸며진 진료실에는 중년의 남자 의사가 편해 보이지만 깔끔한 캐주얼 차림으로 앉아 있다. 학부생 시절 심리학을 배울 때 의사는 흰색 가운을 입었을 때와 입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크다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흰색 가운은 의사와 환자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일종의 권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에게 동일한 말을 해도 가운을 입은 의사가 전달하는 내용이 그렇지 않은 의사가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전달력이 강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다행이다. 최소한 내 상황이 흰색 가운에 묻히지는 않을 것 같다.
그동안의 사건과 이런 증상이 올 때마다 느껴지는 내 감정과 신체의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계속하여 내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의사는 나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이미 많이 경험했다는 듯 내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의 공백이 생기자 바로 말을 한다.
“전형적인 공황장애의 증상입니다. 약 드시면 낫습니다. 다만 최소 2년 간 꾸준히 드셔야 합니다. 처방전을 써드릴 테니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드시면 됩니다. 2주 분량을 지어드릴 테니 2주 후에 내방하시면 됩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 지 길어야 2분가량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1분 정도가 지났을 때부터 내가 느끼는 내 증상의 심각성과는 달리 의사의 표정은 별 것 아닌 공황장애 증상이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황장애를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될 것이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통상적인 내용을 듣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평균 5분 정도의 시간을 상담하고 나왔다. 처방전을 받았고 일단 2주 분량의 약을 조제하여 병원 건물을 나섰다.
‘내가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 병원에 왔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공황장애로 의심은 되지만 공황장애는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하루에 수십 명이 오는 이 병원에서는 나도 여러 공황장애 환자 중에 한 명일 것이다. 기대와 달리 너무 빠르고 명쾌한 공황장애 진단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그 와중에 수중에는 약이 있다. 약이 있었지만 먹지는 않았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평생 이 약에 의지해야 할 것 같았다.
집까지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이다. 돌아갈 때는 전철을 타고 가야겠다. 이 증상을 겪은 후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는 것이다. 한 정거장 밖에 되지 않으니 타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역에 들어서자 지하로 족히 5층 정도까지는 내려가는 것 같다. 이상하게 지하로 내려갈수록 머리에서 ‘우웅~’ 소리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서히 기분이 좋지 않아 진다. 왠지 불안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안 되겠다. 나가야겠다. 플랫폼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있던 사촌동생이 나를 부른 것이다. 사정이 있어 한국에 몇 주 들어온 모양이다.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에 전철이 왔고 당연한 듯이 같이 전철을 탔다. 나는 다음 역에 먼저 내렸다. 내리고 나서 가만히 조금 전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니 역시나 익숙한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이 증상이 매우 완화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뭔가 해법을 찾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365일 누군가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사무실에 출근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많아 마음이 편하다. 서너 시간 정도 후에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술 한 잔 하고 약간 취한 상태로 집에 가서 푹 자려고 한다. 가능한 익숙한 사람들과 오래 있으려고 노력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야 이놈의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가 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약은 무심코 서랍에 넣어둔다. 약은 절대 먹고 싶지 않다.
퇴근 후 술 한 잔 하며 저녁식사를 한다. 그리고 같이 식사한 네 명이서 스크린골프로 향했다. 요즘 회사에서 스크린 골프 열풍이 한창이다. 골프를 시작하거나 골프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중에 한 명은 일본에서 나와 같이 응급실에 동행했던 타 부서의 선배다. 집에 가는 방향이 비슷해 출퇴근 시 종종 카풀을 한다. 오늘도 돌아갈 때 같이 택시를 타고 가면 되니 안심이다. 식사와 골프가 끝나고 집 근처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 되어 간다. 택시비 절 반을 선배에게 건넸다. 선배는 20분가량 더 택시를 타야 한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다. 가방을 내려놓는다. 순간 ‘쿵’ 하는 느낌과 함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큰일이다 또 한 번 전조증상이 전혀 없이 그놈이 왔다. 심장이 마치 기차의 칙칙폭폭 장단에 맞춰 쿵쾅거리며 서서히 커진다. 몇 번 경험했지만 경험할 때마다 새롭고 무섭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 공포를 이겨보고 싶다. 팔 굽혀 펴기를 하여 온 몸에 힘을 넣어 본다. 소용없다. 눈물이 난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과 하하호호 즐겁게 스크린골프를 쳤으며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선배와 세상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집에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이렇게 죽을 것 같은 이 현실에 눈물이 난다.
“아! 씨 O!!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내 방에서 허공에 외쳐본다. 그래. 엄마에게 전화를 해보는 거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나아질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엄마는 내 전화에 항상 “아들~” 하면서 금세 전화를 받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받자마자 밥 먹었냐는 안부부터 묻는다. 다시 눈물이 핑 돈다. 타지에서 혼자 이런 상태라 힘들다고 도저히 말을 못 하겠다. 엄마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공황 상태인 지금 집중이 안된다. 오히려 끊고 싶다. 울먹이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추며 너무 걱정 말라며 전화를 끊는다. 진정이 되지 않는다. 양팔을 벌려 제자리 뜀뛰기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 약을 먹자. 아~ 오늘 사무실 서랍에 두고 왔다. 다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나를 감싼다. 통제력을 잃었다. 의식이 사라진 내가 보인다. 염치없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올 수 있는 사람은 조금 전에 헤어진 선배다. 아직 택시를 타고 있을지 모른다. 내 상황을 아니 택시를 돌려서 다시 와줄 수 있을 것이다. 선배에게 전화하자 집에 거의 다와 가는 모양이다. 나는 다급히 죽을 것 같으니 택시에서 내리지 말고 그대로 이쪽으로 다시 와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장난하는 줄 알던 선배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며 이쪽으로 온다고 한다. 부탁하면서도 미안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무슨 민폐인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지금 나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방금 전에 헤어진 사람에게 다시 전화해서 와 달라니.. 20여분 정도가 지났을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선배가 온 모양이다. 그 사이에 내 증상은 없어졌다. 누군가 온다고 하니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이 증상이 오고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살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약을 먹으면 괜찮아 질까?
선배가 방에 들어왔다. 멀쩡한 나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일본에서의 상황을 공유했던 사람이니 그나마 이해는 해주는 것 같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니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약 이야기를 하자 선배가 먹으라고 한다. 한사코 먹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증상을 다시 경험하니 먹어야겠다. 약이 사무실에 있다는 얘기에 선배가 혹시 모르니 사무실에 전화를 해본다. 야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누군가 있다. 전화를 받는다. 내 책상에서 약을 꺼내 퀵서비스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1시간 즈음 지나자 약이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 한 봉지를 처음으로 먹었다. 내가 약을 먹는 모습을 확인한 선배는 돌아갔다.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약기운인지 이런저런 불길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푹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맑은 컨디션으로 잠에서 깼다. 정신과 의사는 내가 공황장애라고 했지만 한 명의 의사와 면담하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그렇게 혹독하게 또 경험했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정신과 병원을 옮겨 상담받아도 똑같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공황장애라는 판단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정신과가 아닌 심리상담소에 가봐야겠다. 비록 어제 약을 먹었지만 아직 내가 공황장애라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