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세에 접어들면서 결혼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까지 생겼다. 주변 친구들이 거의 결혼을 했고 나를 포함하여 두 세명 정도만 미혼인 상태다. 어렸을 적부터 ‘38세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으며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서도 나에게 결혼 계획에 물어보는 빈도가 잦아졌지만 나는 언제나 “38세에 할 겁니다.”라며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런 내가 이미 지금은 38세이며 아직 상대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아무나 붙잡고 만나 적당한 선에서 적당히 조율하여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시간에 맞춰 언제까지 꼭 해야 한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결혼은 하고 싶으니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찾아보자라는 생각은 늘 하고 었다.
오늘은 결혼정보업체가 주선하는 만남을 갖는 날이다. 그것도 네 번째 만남이다. 확실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도 느지막이 결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우연한 만남으로 결혼하는 경우는본 적이 없다. 내 나이가 되면 알고 있던 여자들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결혼해서 아이의 엄마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이혼 후 재혼까지 한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상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대부분 지인들에게 소개를 받거나 지인의 지인을 거쳐 만나는 소위 ‘소개팅’ 밖에 없는 실정이다. 아니면 거래처에 방문할 때 호감 가는 상대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6세 이후에는 결혼할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의 소개팅 제안에 거의 빠짐없이 만났던 것 같다. 많은 경우 일주일에 3회까지 만나기도 했지만 두 번 이상 만났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소개팅 제안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36세를 정점으로 제안받는 횟수가 줄더니 38세가 되니 이런 제안도 줄었다.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졸라서 만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억지 만남은 원하지 않는다. 결혼은 하고 싶었지만 초조한 내색은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던 중에 비교적 최근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결혼을 한 지인에게 자신을 담당했던 결혼정보업체의 매니저를 만나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무슨 돈을 내고 사람을 소개받냐는 내 반응에 “어차피 결혼이라는 같은 목적이 있는 남녀를 지인이 중간에서 이어주는 것이 네가 지금 누군가를 만나는 방법이고 그 지인이 체계를 갖춰 회사를 만든 것이 결혼정보업체다. 여기에 소개비를 지불하고 만나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 나를 봐라.”는 말에 묘하게 설득됐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난 지난 세 번의 만남은 기대와 달리 맘에 들지 않았다. 만나기 전에 그들의 사전 정보가 A4 용지 한 장에 채워져 이력서처럼 메일로 보내져 왔으며 난 이것을 사전에 미리 보고 나간다. 서로가 웬만한 기본 정보는 모두 알고 만나기 때문에 처음 만나지만 낯설지는 않다. 오히려 프로필 상의 사진과 지금 내 앞의 모습이 무척 달라 여기에서 오는 괴리감이 훨씬 큰 경우가 많다. 보통은 호텔 커피숍이나 카페에서 오후 2시~3시 즈음 애매한 시간에 만나 간단히 차 한 잔 하며 한 시간 내외로 서로를 탐색하고 헤어지고 나면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온다. 다시 서로의 의사를 모두 확인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재만남을 원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싫다고 하면 그대로 추가 만남은 없다. 물론 내가 잘나서 지난 세 번의 만남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나를 보고 충분히 같은 생각을 했을 수 있다. 40을 바라보는 보통 남자에 전문직도 아니고 지방에서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다니고 있는 전형적인 노총각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서로에 대한 이러한 정보들이 프로필을 통해 오고 갔으니 앞에 앉아 있는 상대가 기대 이상으로 잘생기거나 예쁘지 않다면 호감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도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만남에 대한 대가로 이미 이백만 원가량을 지불했으니 그 상대를 만났을 때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소위 본전 생각까지 나면서 실망감은 더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돈은 지불했고 어차피 주말에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네 번째 만남을 위해 상대가 살고 있는 집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하는 중이다. 오늘 아침 일본에서 출발하여 12시 조금 넘어 김포공항에 도착해 그대로 만남을 위해 가는 길이다. 늘 그랬듯 토요일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한다. 이번에는 상대가 사는 집 근처로 내가 가기로 한다. 먼저 자리에 앉고 잠시 후 상대가 왔다.
첫인상이 예상보다 좋다. 이전 세 번의 만남에 비하면 오늘이 제일 괜찮다고 느껴진다. 나이는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아래였으며 교직에 있다고 한다.조심스레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하게 된 경위를 물어본다. 이 경우 대답은 대부분 둘 중의 하나다.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가입했거나 나와 같이 점차 나이가 들며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줄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기본 정보야 이미 알고 있어 호구조사를 건너뛰니 대화거리가 크게 없다. 상대가 내 자리 옆에 놓인 가방을 보더니 ‘모양이 특이하네요?’라며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오늘 오전에 일본에서 귀국할 때 하네다 공항 면세점에서 산 가방이 눈에 띈 모양이다. 오전에 귀국하며 샀다고 하자 여성용 같기도 하고 남성용 같기도 하고 모양이 특이하다고 한다.
한 달에 한두 번가량 일본을 드나들며 면세점 앞으로 지나가다가 사고 싶었던 가방이 있었는데 원래 사려고 했던 가방이 아닌 직원이 권유하는 약 삼백만 원가량의 다른 가방을 즉흥적으로 샀던 것이다.
당시 나의 재정 상태는 꽤 좋았다. 회사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았고 투자회사를 통해 투자한 상품에서 연봉 이상의 수입이 수 년째 안정적으로 꾸준히 발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 살고 있어 마음이 가는 대로 돈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몇백만 원씩이나 하는 가방을 거리낌 없이 쉽게 사는 나를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돈 쓰는 게 호탕하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돈을 쓰는 것을 좋게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개의치 않았다. 상대의 맘에 들기 위해 나를 꾸미며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의 서로는 동등한 입장이다.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둘 중 하나라도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이다. 이것이 솔직한 내 맘이다.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첫눈에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대화가 통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상대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대화를 해보면 느낌이 오게 마련이다.이날은 무슨 자신감인지 여기에 더해 시간도애매한데 이른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내가 물었다. 낯선 사람과 식사를 못하는 성격이라 난감해하더니 이내 하겠다고 한다. 마침 근처에 아는 곳이 있어 식사까지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난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복용하고있다. 지난 3월에 공황장애라고 진단받았을 당시에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지금 이렇게 멀쩡해진 상황에서 내가 공황장애라는 사실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오늘부터 당장 복용하던 약을 중단해도 별일 없을 것 같다. 오늘 상대에게 공황장애 얘기를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잘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의 사건 이후 간혹 불안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내 곧잘 극복해 왔다. 불안이라 함은 일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거나 한국에서와 같이 운전을 하다가 그놈이 올 것 같은 불안이 갑자기 들면서 심장이 나대곤 했던 그 불안 및 공포감이다. 예전이라면 불안을 느끼는 순간 초조해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 초조함이 결국 극에 달해 구급차를 불렀을 텐데 최근에는 약을 복용하고 금연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게 되면서 그 불안은 단어 그대로 불안 정도로만 끝났고 극한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 나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불안은 중간중간 있었지만 지금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실예로 오랫동안 골프를 쳐왔는데 근래에 들어 비거리도 상당히 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퍼팅도 잘된다. 지금까지의 베스트 스코어를 이 시기에 모두 경험한 것 같다. 골프는 역시 멘탈 운동이라더니..
그렇게 벌써 6월이 됐다. 6월에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는 달이다. 삼성동 코엑스에서 화장품과 관련된 전시회를 하는데 우리 회사도 전시회에 참가한다. 내가 관련 책임자다 보니 행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준비해야 하고 해외 여러 지사에서도 각종 요청 사항이 많아 모두 대응을 해야 한다. 6월은 이 행사 준비로 한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3일간 개최되는 전시회다 보니 3일 내내 부스를 지키며 방문객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던 나는 부담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됐다. 이미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느끼는 중압감이나 피로감이 작년보다 훨씬 적고 조금 과장하면 거의 없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로울 때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말을 누군가 이때 나에게 살짝 흘려줬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2015년 6월로 되돌아가 내가 나에게 곧 닥칠 상황을 보여주고 반드시 겸손하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