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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mpunyee Jan 25. 2021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쓰러졌다 (공황장애와 결혼#9)

다른 사람의 쓰러진 모습에 잠잠했던 그놈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전시회가 시작됐다. 3일 일정으로 개최 예정이다. 하루하루 일정이 끝나면 우리 스태프들과 손님들 약 10여 명이 저녁식사와 술을 함께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예상대로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마지막 날까지 무사히 마쳤다. 마지막 날인 오늘은 고생한 스태프들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저녁식사를 조금은 성대하게 하려고 한다. 해외지사 손님들이 묵고 있는 호텔 근처의 식당에서 약 20여 명이 모여 식사를 했고 나를 포함한 모두들 제법 술도 많이 마셨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2차로 손님들이 묵고 있는 호텔의 바에서 한 잔 더하기로 하여 8명 정도가 다시 모였다. 이미 1차에서 많이들 마셨지만 2차에서도 꽤나 마셨다. 내일은 주말이니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나도 내일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스탭 두 명을 공항까지 배웅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이런 분위기에 합류했다.


공황장애 진단 이후로 술자리는 매우 조심하고 항상 다음 날 무리가 없을 정도로 1차만 간단하게 했던 내가 이날은 2차까지 했으며 더구나 늦은 시간까지 함께 했다. 이번 행사의 호스트라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내 주량을 시험해보고 싶었기도 했다. 지난 3개월간 몸 관리를 잘했다고 자부했었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이 정도 마셔도 내일의 일정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 어리석게도 이를 시험해 보고 싶었기도 했다. 실제로 오늘의 술자리가 늦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어제 이미 오늘 해야 할 운동을 미리 했을 정도다. 그렇게 새벽 한 시까지 술자리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됐다. 어제 과음을 하기는 했는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손님을 호텔 로비에서 만나 공항까지 배웅해주기로 했으니 호텔로 가야 한다.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다. 어제 호텔에 차를 두고 왔기 때문에 지하철로 이동하기로 했다. 지하철로 6 정거장이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택시를 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지하철에 들어서자 토요일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평소와 달리 자리가 많이 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잘 앉지 않는 나는 늘 그렇듯 객차와 객차 사이 통로 주변 노약자석 근처에서 선채로 이동 중이다.  약간의 숙취가 느껴지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그렇게 한 정거장 정도를 지났을까? 누군가 내 옆구리를 치는 느낌이 들더니 크게 ‘쿵’ 소리가 난다. 깜짝 놀라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쓰러져 있다. 쓰러지면서 나를 부딪힌 모양이다. 이 정도로 큰소리로 ‘쿵’하는 소리가 날 정도면 아마도 머리가 먼저 바닥에 부딪힌 모양이다. 여자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이내 흰자만 보인다. 입에는 하얀 거품이 나오고 있다.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고 숙취와 잠이 완벽하게 깰 정도로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황발작의 한 종류가 아닌가 생각한다. 전공인 심리학 시간에 들었을 때도 무섭다고 생각했던 내용이지만 눈 앞에서 직접 보고 있는 지금의 무서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몸은 그대로 굳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비상벨로 역무원에게 알리라고 한다. 다급하게 마이크를 잡고 눌러보지만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당황스럽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매번 비상벨을 봐왔지만 조작해 봤을 리 없다. 그때 한 중년의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와 여자를 흔들며 괜찮냐고 더니 대답이 없자 바로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대단하다. 나는 계속 비상벨을 누르며 역무원과 통과를 시도한다. 드디어 연결이 됐다. 역무원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객차 번호를 알려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태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설명하는 내 모습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아직도 심폐소생술은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30초 정도 지났을까 다음 역 정차를 위해 지하철은 속도를 줄인다. 바로 그때 여자가 깨어났다. 마치 잠을 자다가 깬 것처럼 비몽사몽 한 상태였지만 이내 벌떡 일어나서 때마침 열리는 문 밖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분명 아무런 말도 없고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그 자리를 신속하게 떠난 것이다. 그럴 경황도 없었겠지만 심폐소생술을 해준 중년의 남성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 순간 “저 사람 똥 쌌네!”라는 말이 들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한 할머니가 한 말이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여자가 떠난 자리에는 누런색의 묽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분명 할머니가 말한 ‘똥’이었다. 그렇게 지하철 문이 닫히고 사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역에서 역무원들이 해당 객차로 확인을 위해 왔으나 쓰러진 여자는 없었다. 누런 흔적만 남아있었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나는 매우 강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의 그 여자는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나 분명 기절했다. 기절한 것이 확실하다. 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괄약근까지 풀려 대변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흰색 눈동자와 입 주변에 거품을 물고 있던 그 모습은 실제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여자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스스로 걸어서 본인의 갈 길을 갔다. 혹자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아직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나도 언제든지 방금 전의 여자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크나큰 불안감이 이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까지 어떤 불안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여자의 쓰러진 모습, 돌아가서 흰자만 보이는 눈, 입 주변의 거품, 누런 대변 이 생생한 모습이 나에게 투사되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영화의 서막처럼 말이다.




비록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해서 기분은 좋지 않다. 오히려 여자가 매번 공공장소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안쓰럽기까지 했다. 서너 정거장을 더 지나 겨우 호텔에 도착했다. 손님 두 명은 이미 로비에 있었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 차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좀 전의 지하철에서 쓰러졌던 여자의 모습으로 가득 차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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