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데?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과거가 없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도 없으며, 자신의 가치를 견주어볼 어떤 기준도 없다. 따라서 아기는 사람들 과의 경험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의존해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해야만 한다.(중략)
어떻게 하면 아이가 언제까지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잃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의미를 찾도록 자극할 수 있을까? 또 이미 알려진 사물들의 새로운 용도를 찾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탐색하게 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상상력은 삶에 생기를 더해주는 요소들이다. 이 세상은 궁금해할 것들도 많고, 경이로움을 느낄 일도 많으며, 탐색하고 도전해 볼 것들로 가득하다.(주 1)
버들아! 니 아들 좀 말려봐~
아랫집 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한 말이다. 우리 OO이 좀 봐라. 얼마나 얌전하니?
이제 막 걷기를 배운 아들은 오늘도 서랍열기에 열심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엄청나게 몰입해 있다.
옷장 서랍을 하나하나 빼고 그 속에 있는 옷들을 밖으로 다 꺼내면서 아랫칸부터 한 칸 한 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 칸 올라갈 때마다 엄마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마치 ‘해냈다’는 성취감에 기쁜 표정이다. 나도 마주 보며 환히 웃어준다. 엄마의 웃음을 본 아이는 다시 두 번째 서랍에 도전한다. 서랍 올라가기가 많이 능숙해진 모습이다.
싱크대도 아들 놀이터였다. 주방용품 및 온갖 살림살이를 다 꺼내서 놀았다. 나는 크게 위험하지 않은 범위에서 집중해서 놀고 있는 아들을 못하게 말리거나 화내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 보니 집안은 늘 너저분했고, 정리를 한다 해도 바로 어질러져 청소한 표시도 없었다.
아랫집 언니네는 울 아들보다 몇 개월 더 빠른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도 우리 집과 달리 집안이 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반짝였다. 그러니 우리 집에 한 번씩 놀러 올 때마다 집이 너무 정신없다며, 아이가 안정되지 못하게 자랄 수 있다면서 자신의 집과 얌전한 자신의 아들과 내 아들을 비교하며 말하곤 했다.
아랫집 언니네 집의 깨끗함의 비밀 병기는 TV광고 비디오였다. 늘 정리가 안된 우리 집이 못마땅했던 언니는 특별 선물이라며 TV 광고 비디오를 내게 주었다.
아들도 TV 광고를 꽤 좋아한다. 놀다가도 광고 소리가 들리면 TV 앞으로 가서 잠시 집중했다가 광고가 끝나면 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언니의 특별한 선물인 TV 광고 비디오는 드라마틱하게 효과가 있었다.
120분짜리 TV광고 비디오는 아들을 TV 앞에 꽉! 잡아두었다. 좋아하는 음식도 시선을 TV 둔 채 먹었다. 아들이 꼼짝 않고 앉아 있으니 집안은 정리된 채 깔끔하여 쾌적한 공간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아들의 놀이를 지켜보지 않아도 되니 나에게도 나만의 시간도 주어졌다. 오랜만에 육아서를 펼쳤다.
1-3세는 ‘자율성 대 수치심과 의심’ 단계로, 나무의 어린싹이 지면 위로 올라로는 시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걷기, 말하기, 화장실 가기 등을 배우면서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모가 아이의 시도를 격려하고 적절한 한계를 설정해 준다면 아이는 자율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중략)
이 시기에 아이들이 경험하는 작은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아이의 미래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보호자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적절한 지지와 가이드를 제공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건강한 자아상을 형성하고, 앞으로의 발달단계를 잘 준비할 수 있다.(에릭 에릭슨의 심리학 심리사회발달이론 톺아보기, 정태웅, 루미너리북스)
[스마트폰 이용이 영, 유아기 뇌 발달에 미치는 영향]
- 영유아기는 다른 연령에 비해 뇌발달 속도가 빨라요.
- 유아기는 뇌 발달의 결정적 시기로 기억과 감정을 관장하는 해마 발달의 민감기에 해당해요.
- 자신의 감정과 충동을 참고 조절해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 영, 유아기에는 뇌 구조와 기능의 발달 수준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만큼 스마트폰의 부정적 영향에 취약해요.
- 특히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스마트폰 전자파는 성인보다 두개골이 얇고 뇌의 크기가 작은 유아에게 더 해로워 주의가 필요해요.
-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강한 자극에 자주 노출되면 아이의 뇌구조가 변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예요.
(NIA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나는 순간 TV속에 푹 빠진 아들을 쳐다보았다. 지면 위에 올라온 싹이 성장을 멈추고, 아이의 뇌 발달이 정지된 듯 느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깨끗한 집 vs 아이 교육, 지금 뭣이 중요한데?
정신을 차린 후 얼른 바보상자를 끄고 아들을 탈출시켰다. 그리고 깨끗한 집의 특별 병기인 TV 광고 비디오를 그 이후로 다신 틀지 않았다.
아들은 바로 옷장 서랍으로 향했고, 첫 번째 서랍 위에 올라가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집안에서 탐색 놀이와 걷기 연습을 하였고 우리 집은 늘 정리가 부족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남편과 오랜만에 외출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아이는 집과 다른 지면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름 뒤뚱뒤뚱 잘 걷고 있었다. 걷다가 내게 오고 조금 멀리 갔다가 나에게 돌아오곤 했다. 나는 지인과 얘기를 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잠시 대화에 집중한 사이 아들이 넘어졌다. 우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그곳에 뾰족한 모서리가 있는 물건이 있었다. 달려가 아들을 안으니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음을 확인하고 아이를 걷게 했다. 누군가 잠시 꺼내둔 것을 내가 못 본 것이다. 정말 한 순간이었다.
그날 아들의 얼굴, 눈 옆에 세로로 된 큰 흉터가 생겼다! 의사 선생님은 가로로 다쳤으면 성장하면서 옅어질 수 있는데 세로라 크면서 더 또렷해질 것이라고 하시며, 흉터 제거 수술은 성장기가 끝나는 18세 이후나 가능하다고 하셨다.
아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니 내 눈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집안 구석구석의 모서리가 보였다. 나는 아들을 안았다. 내려놓기가 무서웠다. 뒤뚱뒤뚱 걷는 아들이 또 다칠 것 같았다. 아들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칸막이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이 뭔가 새롭게 움직이거나 놀이를 할 때마다 나는 ‘위험해!, 그만!, 가만히 있어!’ 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들이 또 다칠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아들이 이 집안, 내가 제공한 공간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을......
모서리들을 테이프로 감았고, 위험한 것이 있는지 계속 확인하며 아들이 놀이를 찾고 즐기도록 두었다. 한 번씩 소리 지르고 싶어 하는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놀이에 집중하는 아들을 눈으로만 지켜보았다.
조그만 얼굴에 빨간 흉터는 눈에 크게 띄었다.
아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면 보는 사람마다 꼭 내게 질문을 했다. 시장에 가도, 병원에 가도, 버스를 타도, 한번 보고 지나칠 사람들이 아들 얼굴 한번 보고, 내 얼굴 한번 보고 다시 아들 얼굴 보며 꼭 묻곤 했다.
"애 얼굴에 흉터예요? 어쩌다 그랬어요? ", "뾰족한데 넘어졌어요~" ,
"아이고 엄마가 애를 잘 봤어야지~"
가슴에 비수가 꽂히 듯 아팠다. 아들의 흉터는 내게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였다.
처음엔 너무 아프고, 부끄러워 외출하기가 부담스러웠지만 듣고 있을 아기(아이)를 위해 나는 "그러게요, 그래도 눈이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에요. 보는 데는 아무 지장 없어요"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흉터 따위 아무 상관없는 척 씩씩하게 대답했다. 듣고 있는 아이가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계속 바깥세상을 보여줬다.
남들은 한번 묻는 것이지만 나는 몇십 번 아니 그보다 더 훨씬 많이 대답했다. 대답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남의 아픔을 내가 먼저 묻지 않겠다고....
사람들은 순간의 호기심으로 질문하지만 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아픔이고, 대답에 지쳐있을 수 있기에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 전까지 절대 묻지 않는다.
아들이 어린이집을 가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게 묻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아마 아들에게 직접 많이 질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얼굴의 흉터에 대해 내게 일체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아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내 눈은 그 흉터에 머물며 ’저 흉터만 없었으면~, 그때 내가 더 잘 챙겼으면~, 그때 거기 안 갔으면~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계속 가슴에 남았다.
드디어 대학 입학!
나는 아들에게 흉터제거 수술에 대해 제의했고, 함께 병원 가서 상담도 받았다. 수술은 까다롭고 복잡했다. 상담 후 아들은 바로 수술 예약을 하지 않고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아들의 결정은 보류되었고,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갔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취업 준비에 나섰다. 이후 대기업 최종 면접에서 연이어 불합격되었다. 서류 전형, 인적성 검사를 통과한 후 힘들게 기회를 얻게 된 면접에서의 탈락은 나와 아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또 아들에게 흉터 제거수술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왠지 면접에서의 첫인상에 아들의 흉터가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일단 좀 더 노력해 보고 나중에 결정하자고 했다. 이후 1박 2일 합숙 면접을 거쳐 회사에 최종 합격했다.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아들을 믿지 못하고 조바심을 냈던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최근 아들의 상견례도 치렀다. 곧 결혼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들의 흉터가 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여도 큰 걱정이 없다. 이제 나의 주홍글씨도 희미해졌다.
토닥토닥)
* 얼굴 흉터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야 하는 아들! 대답할 때마다 짜증도 나고 힘들었지? 지금도 대답을 하겠구나...... 엄마가 그때 조금 더 주변을 살폈어야 했는데 진짜 진짜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왜 이런 흉터를 생기게 했냐"라고 화내고 따지지 않아 주어서.....'
* 흉터에 연연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멋진 아들!,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흉터에 엄마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그런 엄마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넓은 아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다. 늘 조금 부족한 엄마라 참, 미안하다!
오래 울어본 사람은 안다. 눈물이 마른자리에서 비로소 따스한 것이 자란다는 걸.
한동안 깨진 그릇으로 살았다. 무엇을 담아도 금이 간 자리마다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때 알았다.
익는다는 건 새로운 그릇을 찾는 일이 아니라 깨어진 그릇 속에서도 온도를 지켜내는 일이라는 걸. (주 2)
나는 아들의 흉터를 지워주고 처음의 깨끗한 얼굴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가 부족했던 순간을 지워버리고 싶었고 그 흉터가 아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은 달랐다. 그 흉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수용하고 성장하며 빛을 발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오랜 눈물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익어가고 있었다.
주 1)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 버지니아 사티어, 포레스트북스
주 2) 사물에 닿는 시 4 (익는다는 것 중에서), 모카레몬, 브런치
사진. ko_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