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질문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들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어느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과잉 적용되어 왔습니다. 배움에 때가 있다고 해서 배움이 학창 시절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배움에 때가 있듯이 ‘노는 것’에도 때가 있지만 놀기만 하면 안 되듯이요.
사실, 배움은 평생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배움에 때가 있다’는 말은 ‘특정한 형태의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배움이 평생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학창 시절로 한정하여 저 말을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가 과거(완화되어가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학벌이 좋지 않으면 평생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19세 때의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다니 참 불합리한 사회였죠. 비록 학창 시절을 희생시키더라도 대학은 반드시 갈 필요가 있다고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실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후회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바꾸는 대신, 아이들의 삶에서 이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별개의 인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라는 행복도 다르고, 살아가는 시대도 다릅니다. 부모가 30년 전에 했어야 할(그러나 안타깝게도 못한) 과제들은 부모의 선에서 끝나야 하는 과제이지, 아이의 과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 좀 힘들더라도 더 독하게 공부할걸.' 하는 말은 같은 시대를 산 어른들끼리는 공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공감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이들을 설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대학은 더 이상 성공의 보증수표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어내야 할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놀기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해야 할 노력의 방향은 어른들이 학창 시절에 했어야 할 노력의 방향과는 다른 모습을 띄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에 걸맞은 형태여야 겠지요.
이는 어른들에게 큰 혼란을 주겠지만, 사실 잘만 방향을 잡는다면 새로운 세대에게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고 생각하기보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차별을 덜 받는 사회'라고 생각하면 어떤가요? 기존의 방식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성공의 문은 바늘구멍보다도 좁아졌지만 하나의 문이 닫힌 대신 여러 개의 새로운 문들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학창 시절을 되돌아봅시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으며 잃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학창 시절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어야 하는데, 아직도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밤늦게까지 야자를 하고 학교에 묶여 있느라 우리가 못했던, 학창 시절에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84년생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우리 세대의 문제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부모 세대보다 훨씬 많은 수가 대학을 나왔지만 심각한 취업난으로 인해 모두가 취업을 하진 못했습니다. 취직에 성공해도 적성에 맞지 않아 더 늦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친구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직업을 얻으려고 보니 자기 적성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동안은 그냥 남들 하니 나도 그럭저럭 해왔는데, 서른이 넘어 뒤늦게 '나는 누구인가'하는 생각이 들고 사춘기가 뒷북을 칩니다.
다시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로 돌아와 봅시다. 학창 시절에 우리가 했어야 할 그 시기의 공부는 단지 수능 성적을 높여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나 자신'에 대한 공부를 했어야 했어요. 그때 나에 대해 고민하고 내 적성과 진로를 찾는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직장에 취직하고도 불행한 사람들이 더욱 많은 것입니다.
3장 '학창 시절에 대한 의미를 묻다'에서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질문을 해 봅시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 이제 학창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돌려주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