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YSBE Nov 11. 2017

4-3. 교육과정을 학생에 맞게 선택할 수는 없을까?

학교는 왜 같은 나이의 학생들끼리만 모여있어야 하나?

  우리는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같은 반에 모여서 수업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물음표를 가지고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조금 특별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학생 구성 방식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보지요. 학교나 학원 이외에 구성원을 나이별로 모아놓는 곳은 어느 곳이 있나요? 아무리 짱구를 굴려보아도, 저는 생각이 나지 않네요.

  학교의 학급 구성원의 나이가 꼭 같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면 서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나이로 분류할 필요가 없지만 학생 때는 나이별로 큰 차이가 있어서 나이로 분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권도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등 아이들이 흔히 많이 다니는 학원들을 보아도 한 학년 학생들끼리 반편성을 하는 경우는 드물며, 여러 학년이 섞여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학년의 아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요.


  몸과 마음의 성장 발달 수준이 비슷한 아이들을 묶는 것이 교육을 하는 데에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는 부분적으로 찬성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학년, 한 학년의 차이가 가장 큰 초등학생들만 보아도 어떤 3학년 아이는 5학년 만하며, 어떤 6학년 아이는 4학년과 키가 비슷합니다. 몸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볼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1학년 아이는 3학년보다도 영어를 빨리 배웁니다. 알파벳은 물론, 읽고 쓰기까지 배우는대로 바로바로 익힙니다. 그러나 3학년 중 부진한 아이는 알파벳조차 구분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같다고 하여 몸과 마음의 성장 발달 수준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성장 발달의 속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빨리 크는 아이가 반드시 훗날 더 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의 역량과 가능성도 아이마다 다르며, 자라는 속도도 아이마다 다릅니다. 만약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을 묶어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여 반 편성을 나이별로 하는 것이라면, 그 틀은 깨질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의 성장과 발달 정도에 맞는 반 편성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적은 아이와 많은 아이가 섞였을 때, 나이가 적은 아이가 위하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도 이름을 부르는 문화 때문인지 나이 때문에 위하감을 느끼지 않는 나라도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나이에 따라 ‘언니’, ‘형’ 등의 호칭을 부르기 때문에 나이가 다른 학생들을 섞어 반편성을 하는 것에 대해 더욱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급 친구들끼리도 ‘ㅇㅇ님’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하고,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를 존칭하고, 존대하다보니 거친 언어가 많이 줄어들고, 학교 폭력 예방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싸울 때도 존대를 하며 싸우기 때문에 싸움이 극으로 치닫지 않습니다. 이렇게 서로 존칭을 한다면, ‘언니’, ‘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하는 위하감은 완화될 것입니다. 또한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이 더 어린 학생들과 수준이 비슷하다고 해서 느끼는 위하감도 줄어들 것입니다. ‘나이’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로 인해 발생하는 권위주의가 많이 완화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더 많이 생겨나겠지요.


  나이로 학급 편성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성장 발달 속도에 맞는 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만약 학년별로 반드시 학급 구성을 해야한다면 교사와 교실의 수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요구를 충족하는 다양한 반을 만드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와 상관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한다면, 학생들의 선택권이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반면, 교사들도 수업을 하면서 수준이 다른 아이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나 에너지 소모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여러 수준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썼던 에너지를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에게 더욱 깊이있는 수업을 하는 데에 쓸 수 있지요. 아이들은 자신에게 더 잘 맞는 양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고, 교사들도 가르치는 기쁨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학년제 선택형 교육과정을 실제로 적용하고 있는 학교들의 사례도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자유학교 ‘서머힐’을 들 수 있습니다. 서머힐은 1921년 영국의 교육가 니일(A.S. Neill)이 설립한 학교로 5세가 되면 입학할 수 있으며 16세까지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어요. 가장 오래된 대안학교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자유학교 운동(free school movement)·개방교실(open classroom)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이들 내면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강요가 없는 자유로운 학생활동을 철저히 보장하고, 학생자치를 강력히 권장합니다.

  서머힐 학교에는 시간표는 있으나 교실에 학생이 들어가는 것 또한 자유라고 합니다. 서머힐 학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이를 문제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고 하네요. “아이들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을 권리가 있고 바쁠 권리도 있어요.” 아이들에게도 인생의 문제들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 특히 상처받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상처 치유나 마음의 안정이 수업보다 우선이기에 어린 아이들에게도 휴학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집중할 수 있는 대안적인 수업이나 활동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요. 그러나 이러한 학교 제도라면 아예 휴학이 필요가 없겠네요.


  여기까지 들은 분들 중에는 혹시나 이러한 제도가 학력의 저하를 가져오지 않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실제로 영국 서머힐 학교도 그러한 우려 때문에 위기를 겪기도 했지요. 영국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을 강제로 수업에 참여시키라’는 요구를 하였는데 학교 측에서는 ‘시설 개선은 하겠지만 국정교과는 의무적으로 이수할 수 없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결과는 학교의 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 후, 교육청은 학교평가에서 서머힐 학교의 모든 항목에 합격점을 주었다고 하네요. 또한 서머힐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 각계각층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즉, 수업의 자율권과 학생의 수업 선택권 보장이 학생들의 학력이나 미래의 직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무학년제 선택형 교육과정이 오히려 학생의 진정한 학력 향상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막 살고 싶어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말로는 ‘막 살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보면 상처로 곪아터져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심은 ‘저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으니 될대로 되라지요.’라는 것이지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실에서 잠을 자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통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알아듣겠고, 노력해봐야 따라갈 수도 없고, 어차피 대학가기도 글렀으니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들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학력 저하를 심화시킵니다. 고등학교 수업을 못알아듣는 학생이 자신의 나이 때문에 고등학교 과정을 듣는 것은 오히려 학력저하를 부르지요. 그 학생은 차라리 중학교 과정의 수업을 듣는 것이 학력을 향상시키는 길입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듣고 나면, 자신감이 생겨서 그 다음 단계에도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죠.

  실제로 제가 겪은 사례도 여럿 있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5학년이었는데 항상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였습니다. 알파벳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지요. 학교에서 저에게 영어 프로그램을 만들 기회를 주어 알파벳부터 단어 읽기를 배울 수 있는 수업을 만들어 그 아이를 방과후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에는 ‘저는 해도 소용이 없어요.’라고 했지만, 한 달이 가지 않아 5학년 듣기 문제를 대부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한 달이 지나자 알파벳 음가를 익혀 처음 보는 단어도 소리내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학기가 되자 ‘이제 단어 쓰기 시험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에 ‘너에게 필요한 것을 할 것이고, 너의 속도에 맞출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부분까지 해 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도, ‘이제 실력이 는 것 같은데, 어디까지 공부할 수 있겠니?’라고 물은 것이었지요. 그 아이는 처음에는 단어 5개를 외워 오겠다고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단원의 모든 단어와 문장까지도 몇 개 외워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수업 태도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슬픈 일은, 그렇게 아이의 수준과 진도를 따라가주는 일을 1년 후에 멈추게 되자, 6학년이 되어 다시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가 시사하는 점이 무엇일까요? 아이의 속도에 맞지 않는 수업을 강제로 참여하게 하는 것은 권력의 남용이자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도 자신의 수준과 속도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다면, 수업을 포기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자신도 발전하는 것을 즐기고 싶은 아이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에 들어가 앉아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존감도 낮아지고, 태도도 나빠지는 것이지요.

  반항이란 무엇인가요?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권위로 수업을 듣게 강요하지 않으면 아이는 반항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여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가 반항을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지요. 강제는 아이에 대한 폭력이고, 그 폭력에 대해 반항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많은 아이들의 수업권을 빼앗는 획일적인 학년제 교육과정을 계속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이별로 학년을 묶어버리는 것은 반 편성 시의 행정적인 편의 외에는 장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학년제 선택형 교육과정은 학생이 자신의 수준과 발달에 맞는 수업을 선택하여 들을 수 있게 하고, 교사 역시 그 과목 수준이 동질한 집단을 가르칠 수 있어 수업이 편안해 집니다. 학생들은 다양한 나이의 학생들과 교류하고 소통하게 되어 어린 나이부터 다양성을 경험하고, 나이에 따른 권위주의를 완화하는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때로 개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겨 쉬어가기가 필요한 학생들은 자신이 흥미가 있고,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수업이나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도 학년 수업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학생 안에서 솟아나는 자기 발전에 대한 소망을 믿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같은 속도로 일정 내용을 배우도록 강요한다고 그 내용이 그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교육과정을 그들에게 권유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들의 사정과 성장 발달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반항만 하고 학업을 포기했던 학생들이 졸업 후에 철이 들어 자기 진로를 찾아가는 예들은 본적이 있으실 겁니다. 사춘기이기 때문에 반항심이 들어서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나이브한 생각입니다. 현행 교육제도에 대해 어른으로서 책임을 질 생각은 하지 않고, ‘원래 그런 시기다.’라고 말하고 넘겨 버리는 것이지요. 그 결과 너무나 많은 청춘들의 시간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만약 학창시절에 학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학생들이 그 시간에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선택하여 들었다면 과연 학업을 포기했을까요? 아마도 보다 젊은 나이에 적성에 맞게 자기계발을 하고,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어른이 되어있을 겁니다.

  저는 학생때 수업을 그렇게 못따라 가는 학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깝습니다.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늘 뒷전이 되어야 했고, 수능 공부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하찮은 것들’로 분류되었습니다. 저는 공부 말고도 서예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오래 해서 전국대회 상까지 여러 개 탔는데요, 이런것들은 주요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을 갈 때 무시되었어요. 부모님도, 선생님도, ‘취미’로서는 존중하고 칭찬해 주셨지만, 저의 관심사를 ‘적성’으로 인정해주시는 어른들은 거의 없었어요. 공부를 잘 하니 SKY를 가거나, 교대를 가라는 것이 그분들의 현실적인 조언이셨지요. 어른들은 저에게 진로를 강요하지는 않으셨지만, 학창 시절에 다른 가능성들을 볼 기회가 없어서 그들의 말대로 하는 것밖에는 선택권이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제 관심사도, 제가 원하는 삶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학생부터 10년이 넘는 오랜 방황 끝에 이제야 겨우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저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만약 제가 대학생 때부터라도 저의 적성을 잘 살려 캘리그라피나 사진, 그림 동화등에 시간을 쏟았다면, 지금 저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보곤 해요. 만약 제가 학창시절에 저 자신을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면, 제 20대 청춘은 방황으로 점철되지 않았을텐데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현행 나이에 따른 학년별 교육과정의 폭력성과 비효율성을 살펴보고, 무학년제 선택형 교육과정이라는 대안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무학년제 선택형 교육과정이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학교 현장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4-2. 과목 편성, 이대로 가도 좋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