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매일 아침 같은 카페에서 같은 음료를 주문한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계산대 옆에는 "여기서 일하는 직원은 누군가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와 유사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경험을 전제하고, 그것이 당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식의 발화를 통해서만 부당한 대우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일까. '그 일이 당신의 일이 될 수 있다'라는 것에서 출발할 게 아니라, '그런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도 철석같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일까. 잠이 덜 깬 아침에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오늘은 2019년 4월 16일이다.
저걸 쓴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여전히 카페에 간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주문하는 음료는 같다. 메뉴 이름은 동일한데, 맛은 묘하게 다르다. 무엇보다 여기엔 ‘누군가의 가족’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없다.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시민 의식이란 게 성숙해졌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얼마 전 통화했던 콜센터에서도 분명 ‘누군가의 가족’으로 시작하는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는데.
어느 날 우리의 동의 없이 일상으로 침잠한 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분명 다를 거란 말을 종종 보곤 한다. 잘 모르겠다. 당장 무급휴직에 들어간 친구를 비롯해, 팬데믹에 영향받는 이들에게 바이러스는 분명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어떤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애초부터 어떤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사람에겐 작금의 사태가 극적으로 일상을 병들게 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사회적 혹은 물리적 거리두기와 같은 단어를 자주 마주하지만 그걸 볼 때마다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둔 채 살아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상황이 바뀌면 생각도 변하기 마련이다. 유사 경험을 전제해야만 느슨한 연대라도 생각할 수 있단 접근에 다소 비관적인 작년과 달리, 올해의 난 이 바이러스의 시대가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확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 말이다. 이것이 ‘나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마음보단 ‘당장 내가 오염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이젠 뭐가 먼저라는 게 크게 상관이 없다. 비슷한 경험치를 획득했다고 곧장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을 획득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경험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고하느냐의 문제니까.
전혀 닮지 않은 일화 속에서 일치하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는 습관은 하루아침에 길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꽤 많은 비용과 좌절이 수반된다. 그걸 줄여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특정한 경험이다. 어떤 것과 자주 마주하는 경험. 자주 보고 반복하면 그게 말 그대로 일상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우린 이 문장과 더욱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당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오늘은 4월 1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