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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Feb 26. 2023

치앙마이의 욱일기

태국여행 ④ 태국과 일본의 성취


4층까지 있는 센트럴 페스티벌 치앙마이엔 대부분의 쇼핑몰이 그러하듯 가장 위층에 음식점이 가득 들어차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시간은 내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할 만큼 행복하다. 음식점의 50퍼센트가량이 일식당인 것을 보고 친구는 “여기 일본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일본인들이 많이 사나 봐.”라고 한다. 일본의 식민지 아래 있었던 베트남에서 만난 일본은 그럴듯했지만 한 번도 식민지의 경험이 없는 태국에 일본의 자동차, 일본음식, 일본의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옷가지들(특히 잠옷, 문구류 또한)을 보며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궁금해진다. 얼핏 봐도 거리의 거의 모든 자동차가 일본 자동차인 것을 보면 서로 무엇을 주고받고 있는지 무역이라는 경제적 측면부터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태국은 주로 자동차, 전기전자 산업의 부품소재를 수입해 완성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무역의존도가 100을 상회해 수출입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국가이다. (한국 59.83%/2020) 1980년 태국의 무역량은 약 218억 달러에 불과하였으나 2007년 무역량은 2,924억 달러, 2021년 12월 기준 태국의 총 교역액은 사상 최고치인 5,388억 달러를 기록했다. 태국의 최대 교역국은 차례대로 중국, 일본, 미국 순이다. 태국의 주요 수출대상국은 중국, 미국, 일본, 홍콩, 베트남, 호주 등이다. 미국은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중국을 제치고 태국의 최대 수출대상국으로 부상했으나 2017년부터 중국이 다시 태국의 최대수출국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2016년 기준 한국은 태국의 17위 수출국가다.) 태국의 수입대상국은 중국,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 등이다. 중국은 2014년부터 태국의 1위 수입대상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대부분의 나라와 수입이 감소세를 기록했을 때에도 매년 증가세를 나타냈다. 반면 일본은 2013년까지 태국의 최대 수입 대상 국가였으나 2014년부터 2위로 하락했다. (한국은 2018년 6위를 차지했다)


태국의 수출대상국에선 3위, 수입대상국으로는 1위였다가 2위가 된 일본은 단연 태국의 최대교역국이라 할 수 있다.


KOTRA방콕 무역관이 우리나라의 태국 수입시장에서 수출경합도 지수(ESI)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가 태국시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52.97)이고, 대만(48.38), 중국(43.90), 미국 39.68) 순으로 나타났다. 알게 모르게 어디서나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한국이다.

*수출경합도 지수(ESI;Export Similarity Index)는 양국의 수출구조가 유사할수록 경쟁이 높다는 가정 하에 특정시장에서 양국 간의 경쟁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ESI의 값이 100에 가까울수록 두 나라의 수출은 경쟁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대태국 투자 붐을 배경으로 태국은 1980년대 농업중심국가에서 경공업 중심의 공업국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이 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한 분야는 의류, 식품 및 자동차부품 산업으로 이들 분야는 동남아국가 중 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대태국 최대 투자국으로 한 때 전체 투자 중 절반가량을 일본이 차지한 바도 있었다.


늘 가슴 한쪽 어딘가 저며오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태국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의 태국의 일식집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결코 알지 못할 친밀감이 두 나라 사이에 있을 것만 같았다. 역사적으로 태국의 대외관계를 살펴보다 참 대나무에 많은 걸 비유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처럼 뻗어나가는 죽망, 대나무네트워크라 불리는 화교파워가 있다면, 태국의 대나무 외교라는 말도 있다. 휘지만 부러지지 않기에 붙인 이름이라 한다. 또 대나무는 곧은 우리의 선비정신의 표상이기도 하다. 문득 사군자가 생각난다. 휘지만 부러지지 않는 태국의 외교를 접하며 나의 멈출 수 없는 생각은 병자호란까지도 도달했다. ‘우리도 이렇게 했었다면,’


20세기를 앞두고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프랑스의 팽창이 계속되어 베트남을 장악하고 1867년에는 태국의 속국이었던 캄보디아와 태국령인 6개의 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팽창정책이 계속되자 태국은 1886년, 1893년, 1904년 그리고 1907년 등 4차례에 걸쳐 동부와 동남부 등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면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태국은 영국에게도 1909년에 말레이반도의 싸이부리, 끌란딴, 뻐리스, 뜨랭까누 등 4개의 주를 할양하였다. 그 사이 태국 영토의 일부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영국의 개입으로 인도차이나에서의 태국의 지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였는데 이 합의는 태국의 독립에 대한 공식승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태국은 1897년에 영국과 비밀조약을 맺어 독립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다짐받았다.


“태국은 자신의 속국과 영토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태국외교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부 영토의 포기와 그 대가에 의한 독립유지가 비록 실제적으로는 강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시종일관 태국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바로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그러나 강대국 세력의 압력 속에서의 약소국의 수동적 순응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태국 외교의 전형적 특징의 하나로 지적되는 ‘대나무 외교’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19세기 말엽에 거듭되어 온 독립상실의 위기를 모면하면서 태국은 보다 많은 새로운 강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태국은 처음에 중립을 견지하였다. 왕 자신이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당시엔 친 독일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 독일과의 불편한 과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태국의 철도개발에 직접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측에 기울지 않고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선전포고를 하자 연합국 측의 승리가 명백해졌다. 이에 태국은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1917.7.22) 이어 약 1000명의 군대를 프랑스에 파병하였다.(1918.4) 그 결과 태국은 연합국 측의 일원이 되어 승전 진영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태국 외교의 탁월한 순응성 및 유연성을 엿볼 수 있다. 태국은 연합국 측에 가담함으로써 승전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 발언하고 국제연맹의 창설국가가 되며 이는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되어 태국의 독립유지라는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서구국가와 과거에 맺은 불평등조약까지 바로잡고자 했던 점이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태국은 정치, 경제 그리고 사법적으로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열강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들에 윌슨 미국대통령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미국과의 조약을 수정하게 되기도 했다. 미국은 오랫동안 태국에서 누려온 치외법권을 포기하는 등 태국과의 완전한 평등을 인정했다.(1920.12) 태국은 1926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수 있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의 면모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태국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분명해질 때까지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고 정세를 냉정히 관망하는 ‘기다리는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다. 강대세력 속의 한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생존 전략으로서의 외교정책의 전형이 어떤 것인가를 태국 외교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태국 외교는 대체로 강인한 나라에게는 순종의 태도를 취하고 주변의 약한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정책을 고수하면서 실리를 취해왔다. 이러한 예는 태국이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망하자 중국을 외면하고 승자인 영국 편에 가담, 의존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시아의 강자인 일본에게,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에 의지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걷잡을 수 없이 했던 많은 서구열강들과의 불평등조약이 생각나 계속해서 조선과 대한제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대 일본이 태국한테는 어떻게 다가갔을까. 부러지지 않는 태국에게 일본은 스멀스멀 다가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태국은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표방하고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그러면서도 전쟁에 대비하여 영국, 프랑스,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기도 하였다.(1940) 1941년 여름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태국은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을 경계하여 미국과 영국에게 무기제공 등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필리핀 방어에 급급하였으며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에 무기를 공급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사전통보도 없이 쌰얌만(현재의 타이만)에 들어와 태국주재 일본대사를 통해 버마와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통로를 제공하라고 통첩하였다. 마치 임진왜란 발발 전 명을 치러 가는데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가 떠오른다. 일본은 그러면서 협조하면 과거에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강압에 의해서 상실한 영토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태국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와 제안에 순응하였다. 당시 수상이었던 피분 쏭크람은 친일 외교파의 중심이었고 과거 영국과 프랑스에게 할애한 영토를 찾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 태국은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 1942년 1월 25일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1944년 7월 일본의 패색이 완연해지자 피분 쏭크람 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중도파의 거두인 쿠엉 아파이웡이 수상이 되어 전후사태에 대비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국내 반일세력을 지휘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내의 태국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반일 운동인 ‘자유타이운동’을 통해 연합국의 인도차이나 지역 내 활동을 도와주었던 쁘리디 파놈용은 전쟁이 끝나자 그다음 날부터 2차 대전 중에 처했던 태국의 입장을 연합국 측에 해명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쁘리디는 1942년의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위헌적 행동이며 따라서 그 선전포고는 무효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1943년에 일본으로부터 얻어낸 영토를 모두 반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전 쁘리디 중심의 자유타이운동이 태국을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어 제2차 대전 중에 주미대사였던 쎄니쁘라못이 귀국하여 수상에 취임하고 쁘리디와 함께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협조, 그리고 소련과 중국과의 타협에 성공함으로써 태국은 1946년 12월에 이르러 승전국의 일원으로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다.


태국 외교의 최고 목표는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독립의 유지에 있었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현실성과 신축성, 그리고 변화하는 주변 상황에의 적응성이 태국 외교의 주요한 특성이다. 또한 그 유연함과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을 오랫동안 잘 지켜와 주위의 강대국들이 부침할 때마다 열강들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이들과 협력하거나 때로는 변화하는 세력균형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왕국을 보전하고 국가의 실리를 도모해 왔다.”


흔들리지 않고 독립을 지켜왔던 태국에 있어 일본은 이후 1952년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교역, 투자, 경제원조 등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상대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바트화 폭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태국에서 태국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 금융회사들은 점포를 모두 정리해 철수해 버렸다. 이후 태국은 한국계 금융사에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해 자국 시장 진입을 거부해 왔다. 2013년이 되어서야 KDB산업은행에 사무소 개설을 허용했다. 하지만 일본의 대응은 달랐다. 오히려 태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고 일본 금융사도 태국 점포를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이를 계기로 태국은 일본 금융사와 기업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의 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2015년 일본은 태국을 핵심 투자대상 지역으로 정하고 투자 분야를 전 산업분야로 확대했다. 태국의 경제발전으로 소비 규모가 커지자 일본은 진출 전략을 기존의 생산기지 확대에서 내수시장 공략으로 발 빠르게 전환했다. 그러나 이미 2007년 태국의 주요 4대 시장에 대한 무역은 ASEAN 19.7%, 일본 15.9%, EU 10.6%, 미국 9.8%의 비중으로 일본은 투자 이전에 막강한 무역상대국이기도 했다. 이건혁 기자는 한국이 IMF경제위기 때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해외 진출 때 정부와 기업, 금융사들이 중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저 한 번의 대응이 연속적이고도 커다란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끝까지 버티며 유지했던 일본은 우호적인 이미지를 쌓았고 이는 일본의 문화가 태국 곳곳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태국인들이 사랑하는 영화 ‘쿠 깜(Khu Kam)’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을 배경으로 하여 태국여성과 일본군 장교의 사랑을 그린 소설 ‘차오프라야에서의 일몰’을 원작으로 한다. 또한 태국과 일본은 모두 국왕이 있는 왕실국가로서 왕실 간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오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방콕의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는 다리 중 14개의 다리에는 일본의 원조를 받았다는 뜻으로 ‘일본 다리’ 등의 글자와 함께 일장기가 그려져 있다. 태국 전역에서 일본식당은 2008년 이후 2배도 아니고 3배나 증가했다. 오늘날 K문화가 사랑받게 된 원인을 비빔밥, 대장금, BTS, 마스크팩 등 오랜 시간 다양한 요소들이 알려짐에 있어 단 하나로 꼽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일본은 태국에 서서히 발을 내딛어 튼튼하고 강력하게도 뿌리를 내렸다.


거리를 걷다 지나가는 자동차 튜닝 가운데의 욱일기를 보고 친구는 화를 낸다. 물론 나 또한 화가 난다. 그러나 그들이 동쪽 먼 나라들 서로 간의 역사를 알고 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가슴 아프지만 욱일기를 세상 곳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로마에서 한 햄버거집 화장실 문에 떡하니 인테리어랍시고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로도 걷잡을 수 없이 많은 곳에서 그것을 발견한 이후로 나는 세계시민에게 동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나라, 길을 걷다 마주치는 아시안을 바라볼 때 떠올리는 나라가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도 포함되려면 얼마 나의 시간이 걸릴까 하곤 생각했다. 그 생각의 답은 지난 몇 년간의 시간 동안에 참 많이 변해왔다. 마음속 그 답 속 시간의 길이가 급격히 짧아져갔다.


“저 사람이 알고 튜닝했을까.” 친구에게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말한다.

“그래도 내 차에 들어가는 중요한 그림인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아보고 해야지.”


전 세계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멋으로서라도 우리의 아픈 역사가 소용되지 않는 날이 오려면, 그리고 한국의 여행객들이 이를 보고 마음 아플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오랜만에 떠오른 질문을 꺼내어본다.


센트럴 페스티벌 치앙마이 4층의 음식점들 사이에는 4년 전엔 없던 한국 음식점들이 들어왔고 한층 아래에는 오픈예정인 ‘GANGNAM CLINIC’이라는 한국인 의사 얼굴이 아주 크게 걸려있다. 곳곳에 서있거나 화면으로 나오는 블랙핑크 리사도 눈에 띈다. 음악과 드라마 등에서의 한류의 영향으로, 또 한식의 세계화 노력으로 K문화는 전 세계 그 어느 때보다 급속도로, 태국 어느 한 쇼핑몰에 입점하여 불판에 구워 먹는 삼겹살로, 치앙마이 구석 한 편의점의 종류별 불닭볶음면으로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강력하게 이들 속에 침투해가고 있다.


2021년 1분기, 태국 내 통상 투자 신청 또는 승인 기준 모두 10~15위권에 머물던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투자신청 1위를 기록했다. 지속한다면, 태국에 대한 영향력이 일본을 뛰어넘는다면, 바뀔 것이다. 대나무와 같은 부러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곧음은 태국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앞의 수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돈 많은 사람이, 기업이 투자를 잘해야 된다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태국에 아무리 만연한 일장기라 하여도 나는 ‘점진적인’ 나비‘들’의 날갯짓이 태풍을 몰고 온다고 믿는다.


외환위기 당시의 대응이 그 국가의 최대교역국이 되었고 식당이건 자동차이건 온 나라의 풍경을 뒤덮을 정도로 태국 내 영향력이 막강해진 나라,

세계대전 당시 무슨 방법으로라도 무조건 독립만을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목표의식과 그것을 해낸 나라.

태국과 일본의 모습에 답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태국에 한국의 것이 더 많이 보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라는 나비는 무엇을 해야 할까? 친구야, 일단









“우리 오늘은 한식당에 가보자!”





























참고, 인용


단행본

『태국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한국태국학회, 2008


기사

2017, FORUM, ‘태국과 일본,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상호 우정을 쌓다’

2019, 동아일보, ‘태국서 잘 나가는 日의 비결은…’, 이건혁

2019, 머니투데이, ‘싸와디카 아리가또… 친일국가 태국’, 이재은

2021, KOTRA 해외시장뉴스, ‘한국이 최대 신청국이 된 태국 투자 동향’

2022, KOTRA 해외시장뉴스, ‘한-태 교역동향 및 전망’


사이트

제약산업정보포털 https://www.khidi.or.kr

KIEP 대외정책연구원 https://www.kie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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