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조 Feb 15. 2024

변방으로 쓸려가는 사람들

연대보증과 전세사기를 바라보며


"할배여, 와 요즘 안보였는겨? 무슨 일 난 줄 알았어예."


좌판 앞에 쪼그려 앉은 나는 투박한 사투리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압구정 2번 출구에 좌판을 깔았던 어르신이었다. 그런 분이 갑작스레 몇 달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장례식장 영정 사진에서 그 얼굴을 보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던 차였다. 나는 간만에 본 할아버지 얼굴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손녀스러운 타박을 이리저리 늘어놓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마땅한 대답없이 허허거리기만 했다. 팬티 고무줄, 탕약 짜는 삼베, 옷핀들을 주름진 손으로 가지런히 배열하며 좀처럼 시선을 주시지 않았다. 또각이는 하이힐 소리와 젊은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나와 할아버지 사이의 어색한 적막함을 매웠다. 작은 좌판이 압구정 구석에 외따로 처박힌 공간처럼 느껴졌다.


"빚쟁이가…"


애교 반, 구슬리기 반 끝에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단어는 뜻밖이었다. 빚쟁이. 눈이 땡그래진 내가 할아버지를 채근했다. 빚쟁이가 왜요? 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늘임표 낀 말투로 몇 마디 덧붙였다.


"니는 보증 같은 거 서지 마라. 인생 말아먹는 거이다, 그게…."


태풍이었다. 할아버지의 인생을 압구정 2번 출구에 말뚝 박게 한 것은. 태풍에 풍비박산 난 농사를 접고 사업을 해보겠다는 친구놈에게 보증 도장을 찍어준 것이 화근이었다고 했다. 빚은 할아버지를 비롯해 보증을 선 이들의 어깨 위로 놓였다. 웃음이 풍족했던 할아버지네 가족은 결국 빚더미를 이기지 못하고 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을 잃고 나니 할아버지는 웃는 게 어색하다고 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빚쟁이들은 돈 돌려받기가 여의치 않자 좌판 살이 하는 할아버지를 홧김에 때리고 갔다. 그렇게 한 사람의 빚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삼키고 사회 구석으로 내팽개쳐버리는, 보증은 흡사 무시무시한 태풍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 태풍에 휩쓸릴 뻔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막역한 친구의 사업을 위해 지장을 찍고 온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말에 통곡하며 땅을 쳤다. 어떻게 친구를 버리냐, 는 아버지의 당위성에 설득 당한 어린 나는 재깍 아버지 편을 들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 그때가 떠오른 나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울먹이던 어머니는 보증이라는 태풍이 우리 가족이 휩쓸고 갈까 봐, 사회의 변방으로 내팽개쳐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나라서 보증 서는 거 폐지 시켰대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좌판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며 망할 것이 드디어 없어졌냐고 고시랑거렸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기사의 숫자 몇 개를 떠올렸다. 70만 명 중에 44만 명이 연대 보증 연좌제를 벗었다는 게 기사 제목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36만 명은?' 문뜩 나는 구제받지 못한 나머지 보증인들이 궁금해졌다. 그 사람들은 괜찮을까? 사회 변방으로 쓸려내려가 숨죽이며 살고 있는걸까?


나는 모시 적삼을 곱게 차려 입은 할아버지 옆에 다시금 쪼그리고 앉았다. 기상예보에서는 내일 또 태풍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섭다."


나는 무심코 소박한 좌판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2013년에 썼던 글입니다.

연대보증이 철폐되던 해에 썼던 글이에요.


전세사기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이 글이 문뜩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1991년생 최지수씨는 전세사기를 당해 파일럿이라는 꿈을 잠시 접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전세금을 모으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요.


그는 작년 말 이런 현실을 언론에 나와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습니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그를 반짝 언급하고 비대위원장을 하러 떠났죠.

전세사기 특별법은 지금. 아직도. 국회에서 계류중입니다.


전세사기는 법으로 간단히 막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전 없어진 연대보증처럼요.



지수 씨는 그 고통을 자신의 책 <전세지옥>에 담아냈습니다.


지수 씨는 아마 오늘도 넘실거리는 청빛 파도 위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을겁니다.

은빛 생선들을 낚으며 파일럿의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중일 겁니다.

하지만 오늘도 전세사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태풍처럼 앗아가고 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고시원에 여럽사리 자리를 틀었다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서러운 마음이 자꾸 생각납니다.


왜 아무도 이 일에 대해서 나서지 않는 걸까요.

저는 이 사실에 갑갑함을 느낍니다.


올 봄에는 부디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분노하는 당신을 위로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