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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07. 2024

화성과 금성 사이

단편소설

하진의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더니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창의 한가운데로 침을 뱉었다. 퉤. 때 묻은 걸레로 그 위를 닦자 얼룩이 깨끗이 지워졌다. 


“그러다 주인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달리, 사람들은 창문닦이한테 별 관심 없어. 아무도 모른다구.” 


나는 그에게 일갈하듯 워셔액을 창문 위로 뿌렸다. 그는 재미없다며 툴툴거렸다. 창문 너머로 방이 보였다. 시계방 아저씨는 가게뿐만 아니라 집에도 시계가 가득 있었다. 캐러멜같이 진하고 달아 보이는 색의 괘종시계와 미사포를 쓰고 기도하는 마리아를 새긴 벽시계라던가, 그 외엔 손목시계도 장식장에 가득했다. 


나도 한번 그의 가계에서 시계를 산 적이 있다. 검은 배경에 금색으로 그림이 새겨진 손목시계였다. 시계 속에는 하늘을 가리키는 소녀가 새겨져 있다. 소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면 열두 시 방향에 북극성이 더 진한 금색으로 찍혀있다. 


꽤 비쌌지만 나는 두 시간의 고민 끝에 시계를 사기로 했다. 시계방의 괘종시계가 합창하듯 두 번을 노래했다.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어지던 아저씨는 사겠다는 말을 듣고 순식간에 시계를 포장해 내게 넘겨주었다. 그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였다. 


“얼른 끝내고 가서 쉬자. 해가 지겠어.” 

“알겠어. 여기만 닦으면 끝이야.” 


나는 부지런하지만 손이 느리고, 하진은 손이 빠르지만 게을렀다. 우리 둘이 일을 하면 얼추 시간에 맞춰 끝내는 것이 가능했다. 오늘은 총 쉰일곱 개의 창문을 닦았다. 팔이 욱신거렸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개월이니 익숙해질 만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었다. 


하진과 나는 마을의 가장자리에 살았다. 숲과 근접한 곳이었다. 원 모양의 마을의 끄트머리엔 사방에 거대한 숲이 있다. 숲을 제외한 마을이 세상의 전부였다. 숲의 나무는 마을의 어떤 건물보다도 높았다. 뾰족한 침엽수와 울창한 수풀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엔 금기가 있다. 숲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숲속에 산다는 위험한 동물들과 험한 지형 탓에 정해진 규칙이었다. 마을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이틀 밤낮은 꼬박 걸어야 한다던데, 마을도 충분히 넓어서 숲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하진은 아주 어릴 때 숲속에서 산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물어봐도 그때의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숲에 사람이 살 수 있다면 왜 출입을 금지하겠는가? 아주 예전에 숲으로 간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 여겼다. 


평소처럼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소파에 누우면 마루까지 주저앉을 거 같았다. 하진은 귀찮다며 통조림 수프를 먹고 잘 것이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귀찮고 피곤한 것이 너무 많다며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을 즐겼다. 그래도 항상 내 번거로운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미트 파이를 사 오잔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상점가로 나와 주었다. 늦게까지 카드게임을 하다가 하진은 방에 들어갔고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나의 일과는 창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곤 세수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는 내 오랜 습관이었다. 창문을 열면 한적한 주택가의 도로와 높이가 비슷한 건물들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하진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아침이었다. 그때 하진은 길거리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창문 너머로 그를 보던 나까지 발견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뭘 봐, 구경났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길에 누워서, 모르는 사람한테 소리를 지를 수 있지? 확실히 나와 다른 사람일 것 같았다. 잠시 후 신고를 받았는지 멀리서 경찰이 오자 하진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나는 심장이 뛰었다. 그가 왜 하필 많고 많은 집중에 내 집의 문을 두드렸을까. 하진이 문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달리. 이 문만 열어주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그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 싶어졌다.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의식적으로 접어두었다. 그의 말에 홀린 듯이 문을 열었다. 하진은 그 이후로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싸우기도 했지만 하진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물렀고 창문닦이를 하잔 권유에도 응해주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냐고 묻자, “문패에 다 쓰여 있잖아”라고 답했다. 생각보다 싱거운 대답이었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하진이 아침부터 이상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습관처럼 신문을 펼치더니 눈이 밥공기만 해졌다. 내가 읽었을 땐 아무 이상한 기사도 없었다. 그가 오늘은 일을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의 변덕을 알고 있던 터라 그러라고 했다. 


퇴근 후에 돌아온 집은 난장판이었다. 신발장이고 장롱이고 서랍이고, 방 안에 수납장은 죄다 열려있었으며 바닥에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녔다. 발에 채는 것들을 피해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큰 배낭이 두 개, 하진이 그 옆에 앉아있었다. 하진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지체 없이 말했다. 


“우리, 마을을 떠나자.” 

“마을을 떠나자니?” 

“이 기사 봤어?” 


하진은 내 코앞까지 신문을 펼쳐서 들이댔다. 6면 즈음 숲 앞에 철창을 교체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적혀 있었다. 


“철창이야 낡았으니 바꿀 수도 있지. 그게 어째서?” 

“그땐 정말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될 테니까, 지금 떠나야 해.” 

“지금 숲으로 가자는 거야?” 

“숲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는 거야.” 


그의 말은 이상했다. 마을 밖에는 온통 숲밖에 없다. 그렇게 배우고 자랐으니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숲이 아닌 밖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의 얼굴은 전에 본 적 없이 진지했다. 하진은 망설이다가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곤 내게 다가왔다. 


“너도 평소에 숲에 대해 궁금해했잖아? 숲이 험하긴 해도 위험한 동물 같은 건 없어. 예전에 널 도와주겠다 한 적이 있지? 지금이 그 기회야.” 


숲으로 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의 나는 어두운 숲에서 누군가를 쫓았다. 그 사람은 내게서 도망쳤다.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놀라 넘어졌다. 누군가 와서 나를 도와주기라도 할 것처럼 크게 울었다. 그리고 숲에 있던 거대한 문을 발견했다. 


마을의 어떤 건물도 그 문만큼 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딘가 낯이 익다. 어딘가로 들어가는 문도, 나오는 문도 아니고 달랑 문 하나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수천 개의 칼날이 문에서 돋아났다. 거기서 눈을 떴다. 


“하진. 나는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숲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리고 나는 돌아올게.” 


하진은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보지 않아도 내 상태가 어떨지 알았다. 온몸에 핏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내 몫의 가방을 내어줬다. 괜찮냐고 묻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왜 그는 마을을 떠나려는 걸까? 나는 이곳이 좋았다. 누군가 떠나지도 않고 위험한 일도 없는 집에 둘이 함께하고 싶었다. 그를 보내고 혼자 집에 돌아올 때,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동시에 하진을 돕고 싶었다. 그에게 받은 도움만큼 보답하고 싶었다. 나는 말 없이 문을 가리켰다. 


한밤중이라 철창 주변에 조용했다. 경비가 철창 주위를 도는 것을 보고 우리는 숨어서 때를 노렸다. 넘지 못하게끔 세웠기 때문에 철창이 꽤 높았다. 사다리라도 갖고 오지 않는 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람결에 숲은 긴 숨소리를 냈다. 그게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무성한 수풀들이 한데 엉켜 틈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경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하진이 철창에 다가섰다. 한참 철창을 살피며 걷던 그가 말했다. 찾았다. 그가 찾던 것은 개구멍이었다. 구멍은 작은 아이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어릴 땐 여기로 숲에 들락거리곤 했는데.” 


그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걸까. 하진은 개구멍 주변에 철창을 쥐고 흔들었다. 생각보다 철창은 쉽게 구부러졌다. 개구멍의 주변 철창을 수차례 발로 밀어내자 틈이 넓어졌다. 우리의 몸이 들어갈 정도가 되자 가방부터 밀어 넣고 하진이 기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자.” 


내민 그의 손을 잡고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가 돌아오기 전에 숲에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수풀을 헤치며 숲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어둠 속으로 빨려가는 듯했다. 방향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하진의 등을 따라서 갈 뿐이었다. 한참동안 풀을 헤치는 소리만 들렸다. 땀방울이 턱에 흘러내렸다. 암흑 속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았다. 


튀어나온 가지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렸다. 하진을 붙잡으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를 부르려던 찰나 그가 나를 잡았다. 숲에 들어갈수록 빽빽하던 나무 사이에 빈틈이 생겼다. 걷기 수월해지자 하진이 가방에서 랜턴을 꺼냈다. 흐릿하던 나무의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찌르르,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가 숲을 채웠다. 


“저번에 말한 적 있지? 나는 어릴 때 숲에서 자랐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기억하는 건 나 같은 애들이 여럿 있었다는 거야.” 


떠돌이 신세로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숲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숲에는 어떤 위협적인 존재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훔친 물건들로 세운 판자집에서 아이들은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마을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가봤자 우릴 받아주는 사람도 없고, 왜 숲을 숨기는지 알고 싶었거든.” 

“그래서 답을 찾았어?” 

“어느 정도는. 숲의 안 사정은 알게 됐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바깥에 뭐가 있는가야.” 


그는 헤매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했다. 앞을 막는 나뭇가지는 잘라내고, 나무의 모양을 살피기 위해 랜턴을 이리저리 갖다 대며. 숲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하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등만 보고 걷느라 앞을 살피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있었다. 다른 나무들과 비교해 지내온 세기가 달라 보였다. 둘레가 집 한 채 크기와 견줄 만 했다. 그 크기에 압도당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불현듯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돌풍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눈을 뜨기 힘들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오가며 소리가 울렸다. 


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숲에 이질적으로 세워져 있던 문이 겹치었다. 문에 손을 대려던 순간 칼날이 돋아나던 것처럼, 고목이 내 손길을 거부하는 듯이 바람이 불었다. 하진은 갈피를 잡았는지 고목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걷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곳에서 오솔길을 발견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게 분명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숲은 금지된 장소일 텐데, 왜 이런 길이 있을까. 하진은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걸까. 


“하진.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물어봐.” 

“왜 그날 길거리에 누워있던 거야?” 


하진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서로의 과거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게 된다면 꽤 오래,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나는 그의 과거가 알고 싶었다. 하진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답했다. 


“별일 아니었어. 일하던 곳에서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뭐라고 하길래 홧김에 일을 그만둬 버렸거든. 꿀꿀한 기분으로 돌아다니는데 웬 남자가 나를 밀치고 가방을 훔쳐 가는 거야. 그때 뒤로 넘어졌는데 일어날 기력도 없고, 그놈을 쫓아갈 힘도 없어서 그냥 누워있었어.”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하진은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들어 내 가방 위에 앉은 벌레를 털어주며 말했다. 


“너는 왜 부모님이랑 따로 살아? 나야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지만, 너는 부모님이 있잖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큼큼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았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아빠를 만난 일이 실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얘기를 하며 엄마가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 때면 나는 내 몸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태어난 일도 실수일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빠는 내가 성인이 되기 전 숲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화냈지만, 아빠는 결국 떠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아빠의 행방을 추측하기도 했다. 


괜찮아질 거라고 희망을 품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덕에 오히려 견딜만했다. 단념은 희망을 품는 것보다 낫다. 그것은 중독과 같아서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익숙해지면 사람을 망가트린다. 어릴 적 내 방의 창문은 작고보잘 것 없었다. 실수로 딸려온 물건처럼, 어쩐지 없어야 할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이 내 위치를 자각시켜주었다. 있을 데를 찾지 못하고 어중간한 곳에 자리를 잡은 모습이, 마치 내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빠는 어느 날 숲으로 떠나버렸어. 엄마가 반대하니까 나한테 묻더라고. 같이 숲으로 떠나지 않겠냐고. 나는 두 분이 함께 지내길 바랐는데. 나는 겨우 10살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럴 수 있지. 어렸으니까.” 


아니. 나는 하진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걸지도 몰라. 아빠는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떠났다. 한밤중에 눈을 뜬 나는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한달음에 현관까지 달려나갔다. 닫힌 문이 벽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엄마는 마을의 중앙으로 떠나자고 했다. 나는 마을의 가장자리에 머물렀다. 미련하게 집에 남아 창문으로 바깥을 보면서, 혹여나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중앙에, 아빠는 숲에. 나는 그 사이에서 상실감을 곱씹으며 견뎠다. 우리는 가족과 남 그사이 어딘가를 뱅뱅 맴돌고 있었다. 


오솔길은 오르막으로 향했다. 발을 헛디뎌 무릎을 한번 찧고 끝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묘지가 있었다. 이런 곳에 공동묘지가 있을 줄이야. 사방이 수풀이라 그런지, 그들이 고립된 것 같았다. 비석은 관리하지 않았는지 녹슬고 때가 묻었다. 밤이라 그런지 창백한 누군가의 낯빛처럼 느껴졌다. 하진은 묘비의 글을 읽어주었다. 일평생 마을에서 자라고 마을에서 죽은 이,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히다. 


우리는 잠시 쉬었다가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진이 무엇을 찾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내게 숲은 막연하게 두려운 존재였지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비롭게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과 높게 뻗은 나무들. 숲을 감싸고 있는 청량한 공기에 점차 매료되었다. 내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눈치 챈 하진이 돌아보았다. 그가 물었다. 


“숲의 끝에 뭐가 있는지 알고 나면, 너는 돌아갈 거야?” 

그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지만 애써 감추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돌아가야겠지.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아.” 

“마을에 어떤 감정이라도 남아있어? 아쉬워서 못 떠나는 거지, 아버지가 돌아올까 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을을 떠나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곳에 가서, 게다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등 뒤에 있던 나무에 손뼉을 댔다. 나무가 꽤 크다는 걸 알고 몸을 기댔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떠나고 싶어 하는 거야? 숲의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냥 같이 지내면 안 돼? 전처럼.” 


하진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갑자기 화를 냈다. 


“그게 문제야. 넌 지금 그곳에 사는 게 마음에 들어? 아무도 남지 않은 집에 혼자 누가 올까 봐 창문 밖이나 보면서, 과거에 얽매인 삶을 사는 게?” 

“난,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 너처럼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가면 넌 날 붙잡을 거야?” 


어린 날 아빠를 붙잡지 못했던 것처럼, 하진 역시 떠난다고 하면 막을 방법은 없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고 그는 돌아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돌아가. 네 가방에 여분의 랜턴이 있으니까 그걸 써. 숲의 끝에 뭐가 있든, 네가 찾는 건 없을 거야.”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내쳤다.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우유부단한 나를 이해해주던 그가 아니었다. 내가 찾는 것? 무엇을 기대하고 숲에 들어왔지? 그저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와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도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었다. 


내가 바랬던 것, 얽매여 있는 것, 하진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꽤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다가 발이 꼬여 넘어졌다. 손목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손을 들어보니 시계의 유리가 깨져있었다. 북극성을 가리키는 소녀를 보자 무언가 떠올랐다. 


어릴 때 아빠가 화성인이고 엄마가 금성인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가 모두 그런 이유로 수긍될 수 있다면. 아빠가 숲으로 떠나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곳이 화성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내가 화성인이나 금성인이 아니라서 그 많은 날을 견디지 못했던 거라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이 결과에 수긍하고 싶었다. 비현실적인 일들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나는 숨기려 했지만 하진은 자꾸 그것을 끄집어냈다. 나를 돕겠다고 말한 사람이 있던가. 없었다. 새 시작을 할 기회도 없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며 도와주겠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북극성을 따르듯 하진을 뒤쫓았다.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풀에서 이슬이 묻어 손이 차가웠지만, 수풀을 헤치며 그가 지나간 자리를 찾았다. 새벽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 한참 동안 풀숲을 지났다. 하진이 보였다. 그는 랜턴을 끄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미동 없는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똑같이 나를 마주 안았다.   


누군가 들을까 봐 걱정하듯이 하진이 내 귀에 속삭였다. 


“달리, 이 소리 들려?” 

“무슨 소리?”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뭔가가 들렸다. 그것은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쏴아아. 쏴아. 물소리일까? 하진의 품에서 짠 내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소리를 향해 걸었다.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을 막는 나무는 줄어들고 바깥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육지의 끝이었다. 내가 아는 세상의 끝이었다. 땅이 위치해야 할 자리에 거대한 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크기가 마을의 크기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물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끊임없이 물결을 이끌고 육지에 부딪혔다. 흙이 아닌 모래가 밟혔다. 부드럽게 부서지는 모래사장을 밟으며 하진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저 물을 뭐라고 해?” 


하진도 모르는 건지 대답하지 못했다. 사방에 펼쳐진 관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서 있었다. 누군가 우리의 곁에 다가와 대답해주었다. 


“바다라고 하지.” 


낡은 모자를 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두껍고 거칠어 보이는 손이었다. 


“뱃삯은 있나?” 

“뱃삯이요?” 

“돈 말이야. 여길 떠나려고 온 게 아닌가? 태워다 주지.” 


그의 뒤에 장롱같이 생긴 나무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건네주었다. 남자는 확인도 하지 않고 지갑을 자기 가방에 넣더니 배에 타라고 말했다. 하진도 조금은 머뭇거렸다. 등 뒤를 돌아보니 울창한 숲이 보였다. 저 고립된 곳에 우리가 살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발, 한발. 배 위에 발을 올렸다. 작은 배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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