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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Jul 03. 2022

제육볶음과 돌솥 비빔밥에 10만원을 쓰고 깨달은 것

살인적인 물가의 스위스에서 배운 삶의 재미

배달의 민족도 쿠팡도 없는 스위스에 가면 생활 양식이 180도 바뀐다. 한국에서 계란 후라이, 라면 끓이기를 겨우 하던 사람도 요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나라가 스위스다. 배달음식은 꿈도 못 꾸는 데다, 2명이서 외식 한 번 하면 기본 10만원은 지출해야 하기 때문. 루체른에 있는 한식집에서 제육볶음과 돌솥 비빔밥을 먹는 데 10만원이나 쓰고 나서 깨달았다. '요리를 직접 해야겠다.'


10만원짜리 제육볶음과 돌솥비빔밥

한국에 사는 동안엔 가사(家事)의 중요성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게, 맞벌이 하는 엄마도 살림을 꾸리는 데 관심이 없었고, 한국에선 외식이 싸고 간편하니 직접 음식을 만들 생각조차 못해봤다. 김치찌개도 못 끓이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20년 넘게 사는 동안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스위스인인 남자친구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일요일에는 가족들과 브런치를 즐겼고, 3남매 중 유일하게 마당에서 바베큐를 구울 줄 알았다. 이모네 초대받았을 땐 선물로 피칸파이를 구워갔는데,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 만든 피칸파이를 선물로 들고 가다니, 나 이제 어른 다 된 것 같아." '어른'이 되는 기준이 '피칸파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와 여행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던 스위스 생활은 한국에서 요리를 가장 싫어했던 나도 요리를 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요리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매일 가장 큰 고민은 "오늘 뭐 먹지"였고, 한식 재료를 사러 왕복 2시간 거리에 있는 한인마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스위스에서 난생 처음 불고기, 떡볶이, 잡채, 후라이드 치킨까지 온갖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편식이 심했던 나는 음식을 만들면서 내가 무슨 야채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요리해 둔 것을 먹을 땐, 신경쓰지 않던 음식 재료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야채는 양파, 파, 마늘 같은 종류를 좋아하고 당근은 얇게 썰어서 데치거나 볶아 먹는 걸 선호한다. 깻잎이나 오이, 파프리카 같은 향이 나는 야채는 '극혐'. 그렇게 요리를 완성하고 나면,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더 잘 느껴진다.

음식을 대접하는 재미도 깨우쳤다. '스시'밖에 모르던 스위스 가족들에게 김밥을 소개하고, 각자 방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모아 김밥 만들기 클래스(?)를 열었다. 애인이 독립하고 나서 집들이에 가족들을 초대해 떡볶이와 불고기, 김치 부침개를 대접했다. 스위스 가족들은 미지의 음식인 떡볶이를 찬찬히 살펴본 후 음미했다. 매운 걸 잘 못먹는 내 입맛에 맞췄더니 다행히 그들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재료를 다듬고,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는 게 이토록 즐거운지 처음 알았다.


스위스에서 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종종 요리솜씨를 발휘한다. 스위스 음식인 라끌렛과 퐁듀, 남자친구가 가장  만드는 크림 파스타를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는다.


스위스에서 배운  단순히 '요리하는 '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와 먹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재미, 내가 만든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면서 얻는 기쁨,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 덕에 삶에 의미를 하나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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